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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과 수행/티베탄 펄싱 힐링 연구소
한채연 2008-07-06 10:23:47

채식과 수행

/티베탄 펄싱 힐링 연구소

“육식은 우리의 의식을 땅에 네 다리를 디디고 있는 동물과 같이 땅에 묶이게 할 것이다. 그리고 채식은 하늘로 뻗는 나뭇가지와 같이 우리 의식을 하늘 높이 날게 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식사 할 때 음식앞에서 눈을 감고 음식을 주신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리는 아름다운 풍속이 있다. 그러나 오늘은 올리는 대부분의 감사기도에는 옛 사람들이 느꼈던 참된 메시지가 빠진 하나의 형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원래 기독교에서의 감사기도는 오늘날처럼 “하나님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말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옛 사람들의 기도는 잠시 후면 내 몸속으로 들어가 나의 의식 속에서 흐를 에너지와의 대화를 나누는 하나의 깊은 교류였던 것이다.

그리고 에너지와의 대화란 다름 아닌 코를 통해 에너지의 향기를 맡고, 눈을 통해서 에너지에 채색된 아름다운 빛깔을 보며, 귀를 통하여 에너지의 진동을 들으며, 입으로 에너지를 받아들여 맛있게 먹는 행위 그 자체가 바로 감사의 기도였던 것이다.

그 감사의 기도가 오늘날 입으로, 직접 말로 하는 “감사합니다!”로 대체되어 버린 것은 사람들이 육식을 즐김으로써 유체감각이 둔화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유체감각의 둔화란 인간에게 있어서는 TV로 비유하면 칼라와 스테레오로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을 흑백과 모노로 보고 듣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다. 그리하여 육식을 즐기는 사람들에게서는 자연히 명상의 범위가 좁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육식이 명상에 방해가 된다는 것일까? 티벳의 좌도밀교에서는 돼지고기와 술을 먹고 마시면서도 명상수행을 한다는데 어째서 그들은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도 명상이 잘 된다는 것일까? 그리고 만약 그들이 고기를 먹고도 명상을 할 수 있다면 우리라고 고기를 먹으면서 명상을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사실을 말하자면 그들은 고기를 먹을 때 그들은 자기자신의 전생의 육식에서 살점을 물어 뜯는 것을 느낀다. 그리하여 그들의 고기먹는 행위는 자기자신의 살점을 물어 뜯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들에게는 이미 자신의 과거의 전생을 바라볼 수 있는 수행이 충분히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고기를 물어 뜯을 때 다른 육신에게 연민을 쏟아 부을 수 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육식을 하고서도 명상 수행을 한다는 말만 듣고 무턱대고 육식을 따른다는 것은 매우 무모한 짓이다.

우리의 육체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세포들은 그 하나하나가 라디오의 진공관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가 유체라고 하는 것은 이 진공관과 같은 세포의 모임 속을 흐르고 있는 전기형태의 유질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의 세로파는 진공관은 거의 불이 들어오지 않은 채 잠들어 있다. 이 세포라는 진공관에 불이 많이 켜져 있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은 자기자신의 유체를 민감하게 느낀다.

사실 깨달음(enlightenment)이라는 것은 우리 육체를 이루고 있는 모든 세포에 환히 불이 켜진 상태를 뜻한다고 한다. 그리고 육식은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세포에 생체전기(Bio-Energy)가 자유롭게 흐를 수 없도록 노폐물을 축적시킨다고 한다.

그리하여 육식을 즐기는 사람일수록 그 노폐물이 하나의 전기 절연체와 같은 역할을 하여 세포라는 진공관에 불이 켜질 수가 없다. 그리하여 육식을 즐기는 사람은 자기자신의 내면을 흘러가는 에너지를 바라볼 수 없다.

우리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볼 수 없을 때 자연히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초점의 중심이 외부로 이동한다. 오늘날 인간의 기술문명은 육식에서 비롯하여 외부로 누전된 에너지의 화석이다.

식물은 빛의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를 열매와 잎 등에 고스란히 모았다가 인간에게 전달하여 준다. 그리고 인간은 이 빛의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에너지를 증폭시킬 수 있는 7개의 회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염소와 같은 동물들이 일생동안 아무리 채식만을 하여도 깨달음에 이를 수 없는 것은 동물들은 인간들과 들리 에너지를 증폭시킬 수 있는 회로가 없기 때문이다. 채식은 우리 몸의 세포로 하여금 휘황찬란한 샨데리아와 같이 빛을 내뿜으며 깨어나도록 돕는다. 그리고 채식 중에서도 생식은 잠든 세포들을 더욱 빨리 깨어나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갓나온 아기는 전생과의 연결이 아주 가깝다. 그리고 의식 또한 너무나도 명료하여 어린 아이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 그대로를 보고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아직 마음이라는 컴퓨터를 움직일 줄 모른다.

만약 우리가 어린아이들에게 지금과 같은 숫자 외우기의 교육이 아닌 의식과 마음사이를 연결해 주는 명상교육을 할 수 있다면 어린 아이들은 보다 쉽게 자기들의 전생을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온 어린 아이는 열을 가한 화식을 먹으면서부터 자기자신의 전생의 기억과 점점 멀어져 간다. 그리하여 12살이 지나면 전생과 연결되어 있는 기억으로부터 까마득히 멀어져 간다.

지금에 와서 단식을 살을 빼거나, 육체의 건강을 위하거나, 불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옛날에는 단식이 자기자신의 전생을 기억해 내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생식은 완만하기는 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전생의 기억이 쉽게 되살아 나도록 도움을 준다.

금욕수행을 하는 수도승이나 요기들은 같은 채식이라 하여도 버섯과 같이 음지에서 자란 식물들은 먹지 않는다. 왜냐하면 음지식물은 유체 안에 축기되어 있는 에너지를 외부의 음적인 자극에 쉽게 감응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고추나 마늘, 후추와 같은 음식들을 피하고 있다. 왜냐하면 강한 자극성을 가지고 있는 음식물 또한 외부로부터 오는 자극에 무의식적으로 오감의 문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채식은 인간의 의식으로 하여금 자동적으로 깨어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나라와 같은 상황 속에서는 채식도 아주 심각한 중독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식물을 재배하는 모든 땅으로부터 우리가 뿌린 화학비료와 농약이 그대로 우리의 피 속으로 전달되어 화학반응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농부는 화학비료와 농약을 땅에 뿌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세계에 뿌리고 있는 것이다.

식물들은 우리가 뿌린 화학비료와 농약으로 내내 고통스러워하며 자란다. 따라서 고통에 시달리며 자란 음식물은 우리가 계속 먹을 때 우리 또한 내내 고통에 시달릴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자연과 의식의 세계 속에서는 모든 만물이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채식이라고 무턱대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만약 식물을 재배하려 한다면 우리는 식물에게 야생과 같이 행복한 환경을 논과 밭에도 마련하여 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이란 너무나도 자기 파괴적이다.

불교나 자이나교에서 생명이라면 아무리 하찮은 벌레라도 죽이지 않고 연민의 정을 보내는 것은 존재에 관한 하나의 과학이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 그렇게 많은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미국이 육식국가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햄버거와 켄터키치킨과 같은 육식을 즐긴다.

죽어 있는 동물들의 살을 먹는 그들은 동물들이 죽을 때 피 속에 남긴 노여움과 공포의 화학물질을 매일같이 흡수한다. 이제 그들의 피 속에는 노여움과 공포의 화학물질이 순환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자신들의 피 속으로 흐르고 있는 화학물질을 해소시키기 위하여 ‘람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이제 그들은 사람을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면 영화관에 앉아 공포와 노여움의 화학물질을 집단적으로 뿜어낸다. 그리하여 ‘람보’는 그들의 영웅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람을 죽이고 싶을 때 ‘람보’가 언제나 살인을 대행하여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채식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우리가 깊은 산속에서 자란 고산식물이나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 자기도 모르게 기쁨이 샘속는 것은 자연의 조화 속에서 행복을 만끽하고 자란 식물들을 먹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논밭을 옛날과 같이 다시 쾌적한 환경으로 되돌려 놓아야만 한다. 지금과 같이 인간과 인간이 원하는 식물 이외에 다른 모든 생명들을 농약으로 죽이면서 우리자신의 행복만을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서양의 식당은 고기를 써는 나이프와 토막난 고기를 찍어 먹는 포크로 상징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서양식 상징물들을 그냥 하나의 식사도구로만 보아 넘길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서양 식탁에서의 나이프는 인간이 수많은 갈등과 전쟁을 통하여 살생을 일삼아온 칼의 축소형이요, 포크는 창의 축소형이기 때문이다.

서양은 식탁에서조차 창과 칼을 휘두르고 찌르는 살생의 그림자가 서려있다. 그리하여 서양사람들은 식사때에도 그들의 강한 공격적인 성향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불교 전통이 있는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밥상에서조차 죽어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생명을 존중하는 하나의 상징이 깃들여 있다. 우리가 법당에서 볼 수 있는 부처님의 형상은 모두 연꽃위에 앉아 고요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밥상 위에 놓은 숟가락 또한, 법당에서 부처님을 앉히고 있는 연화좌 모양으로 음식물을 모실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밥상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젓가락 또한, 인간에게 무한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밥상위에서의 젓가락은 마치 하나의 공안과도 같다. 왜냐하면 젓가락 또한 이중적인 구조로 되어있는 마음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는 마음이 하나일 때, 그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가 무위(無爲)가 된다고 가르친다.

이와 마찬가지로 밥상에서 분리되어 있는 두 개의 젓가락도 하나같이 조화되어야만 음식물을 집어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밥상에서 두 개의 젓가락을 통하여 하나의 조화를 배우는 것이다.

인류는 오래 전에 불의 발견과 함께 수렵에 의한 육식을 즐겨 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인류에게 지성이 싹트고 문화와 역사가 일어난 것은 인류가 농경생활을 시작한 뒤의 채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고기도 채소도 에너지를 주는 똑같은 영양소임에는 틀림없다.

그렇지만 육식보다는 채식이 왜 인간에게 지성을 가져다 준다는 것일까? 그리고 왜 채식이 인간에게 명상적인 분위기를 가져다 준다는 것일까?

우주의 모든 물질은 음(音)의 진동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 이르러 물리학자들은 빛세포, 바위와 같은 모든 물질들이 하나의 음에서 비롯한 파동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원소붕괴론도 모든 원소가 음의 파동으로 되어있지 않다면 그 이론의 성립이 불가능하다.

과학자들은 하나의 물질이 음의 파장으로 해체되는 현상을 붕괴라 말한다. 음의 파동으로 일어난 바위는 다시 모래로 분해되고 모래는 또한 보이지 않는 파동의 비형상으로 붕괴하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도 이 물질 붕괴현상의 초극점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우주에는 마음의 붕괴보다 더욱 빠른 현상이 없기 때문이다.

음의 파동은 일정한 싸이클을 넘어가면 그것이 빛이 된다. 따라서 그 빛이 지구에 도달하면 식물들이 그 빛을 자신의 세포 속에 축적한다. 우리가 그 식물을 음식으로 먹을 때, 그것은 우주에서 갓 도착한 음의 파장인 바로 그 결정체를 먹는 것이다.

그리고 동물들이 식물 속에 축적되어 있는 빛을 흡수할 때 빛은 그 물질 속에 깊이 갇혀 버린다. 그러므로 무거운 물질 속에 갇힌 빛은 지구의 중력에 강한 영향을 받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우주를 자유롭게 여행하던 빛은 지구의 중력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육식을 통하여 자유를 잃은 빛의 인자(因子)를 섭취한 우리는 지구에서 탄생과 죽음이라는 윤회의 수레바퀴에 걸려 버리는 것이다.

육식을 계속 즐길 때 지구의 중력에 강한 영향을 받는 빛의 인자를 우리의 세포 속에 게속 축적하게 된다. 그때 인간의 의식은 지구의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이 명상적인 분위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인간의 지구의 중력으로부터 무거운 영향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채식을 계속 할 수 있다면 채식 그 자체가 우리에게 완전한 해방을 가져다 줄 수는 없지만 지구의 중력으로부터 탈출 할 수 있는 모든 기초를 제공하여 줄 수 있다.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위하여 모든 폭력을 배제시키고 그냥 단식만을 하였다. 그리하여 인도는 마하트마 간디의 단식 덕분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간디의 비폭력 평화행진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것은 바로 채식에서 비롯한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정치가들은 간디와 같이 채식을 하여야만 한다. 오늘날의 모든 정치가들이 육식을 즐길 때 그들은 지구의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명상 속에서 사물을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그때 이 세상에서는 여러 가지 이름의 투쟁과 전쟁이 일어난다. 사실 옛날에는 민주주의 제도라는 것이 필요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채식을 하는 현자들이 깊은 명상속에서 사물을 바로 바라보며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 제도를 바라볼 때, 그 이상은 유토피아라고 할지라도 실제로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모든 나라가 거의 전쟁과 폭력으로 시달리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아무리 좋은 제도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제도가 근본적으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뜻한다.

인류가 지금과 같이 육식을 계속할 때 아무런 이상주의도 실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채식을 계속할 때에는 인류의 이상은 아무 거리낌없이 그대로 실현될 것이다. 사실 채식은 우리에게 아무런 이상도 필요하지 않는 존재 그 자체의 자유를 느끼게 할 것이다.

회교가 왼손에는 코란을 들고 코란을 거부하는 이교도들에게 오른손으로 칼을 휘두를 수 있는 이유도 그들이 육식을 즐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다른 이교도에게 100년 동안이나 십자군을 원정보낼 수 있었던 것 또한, 그들이 육식을 즐기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지상에서 육식을 허용하였던 모든 종교는 전쟁을 성전(聖戰)이라는 이름으로 허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채식을 즐기는 종교에서는 그것이 아무리 정당한 싸움이라 할지라도 성전같은 것을 상상할 수 없다.

자이나의 교조인 마하비라(Mahavira)는 자기가 지나가는 길에서 벌레를 밟지 않으려고 항상 빗자루로 길을 쓸고 다녔다고 한다. 지나가는 길에서 하찮은 벌레를 밟을까 조심하는 이가 어떻게 사람을 죽이고 전쟁을 일으킬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자신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동물들을 마구 죽일 수 있다면 우리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인간끼리 서로 죽일 수 있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리고 이와같은 현상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신문이나 TV에서 목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도살장에서 집단적으로 동물들을 살해할 수 있을 때 전쟁터에서 인간끼리 집단적인 살인이 가능하다. 비록 부처님의 말씀 중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어려운 말씀들은 못 들은 척 하더라도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라!”는 이 한 마디만 가슴에 와닿는다면 어떻게 우리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동물들을 집단살인할 수 있단 말인가?

동물들을 도살장에 몰아넣고 집단 살인하는 인간의 이 행위가 결국 인간을 집단적으로 가두어 놓고 가스로 죽이는 히틀러의 아우슈비츠의 종족살해와 박 종철의 죽음까지도 가능하게 하였다. 사실 박 종철 군을 고문살해한 경관은 매일같이 육식을 즐겼음에 틀림없다.

사실을 말하자면 박 종철 군을 죽인 것은 인간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동물들이 죽어가며 뿜어낸 두려움과 노여움의 화학물질이 인간의 몸에 축적되어 있다가 화학반응을 일으켰을 뿐이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박종철 군을 고문으로 죽인 경찰관을 미워한다면 미워하는 자 또한, 육식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참된 채식주의자는 그 자신을 죽일지언정 아무도 미워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참된 채식주의자의 몸 속에서는 두려움과 노여움의 화학반응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 하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육식을 계속할 때 아무리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을지라도 우리의 내면은 동물들의 의식으로 가득할 것이다. 육식을 계속 즐길 때 이 세상은 인간의 가면을 뒤집어 쓴 동물들이 으르렁 거리며 뛰어다니는 밀림과도 같을 것이다.

지금 누가 깊은 산속에 들어간다 하여도 거기에서는 별 위험이 없다. 그러나 지금의 이 세상은 깊은 산속보다 더욱 더 위험하다. 아무리 깊은 산속이라 할지라도 야생동물들이 거의 멸종되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위험이 없다.

그러나 이 세상의 뒷골목과 빌딩의 모퉁이 사이에는 깊은 산속에 있어야 할 무서운 동물들이 바위 뒤에 숨어있는 것과 같이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육식은 그토록 인간으로 하여금 문명속에서 조차 동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성에서도 채식은 인간에게 기쁨을 가져다 준다. 채식을 즐기는 사람은 성에서 에너지의 흐름을 강의 흐름과 같이 완전하게 바라볼 수 있는 명상을 즐길 것이다. 그러나 육식은 성에서 에너지의 흐름을,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지 그 방향을 바라볼 수 없도록 한다.

육식은 성에서 인간을 기계의 반복과 같이 움직이게 하다가 지쳐 버리게 만든다. 지금과 같은 포르노영화나 비디오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그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행위의 되풀이 이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알것이다.

그러나 육식을 즐기는 인간일수록 이 포르노의 비디오 앞에서 흥분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동물들의 가장 기초적인 행위가 바로 이 포르노영화에서 보는 것 같은 반복동작이기 때문이다. 동물의 특성이 먹고 자고 계속 씨를 불려 나가는 것 이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포르노문화는 인간의 의식을 동물의 생식 차원에 고정시켜 버린다. 그러나 인간의 성에는 생식 이상의 것이 담겨있다. 채식은 우리 스스로에게 명상이 일어나도록 도움을 준다. 그리고 채식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의식이다.

육식은 우리의 의식을 땅에 네 다리를 디디고 있는 동물과 같이 땅에 묶이게 할것이다. 그리고 채식은 하늘로 뻗은 나뭇가지와 같이 우리 의식을 하늘 높이 날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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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애
( 2011-10-09 15:07:58 )
감사 합니다 ...마음공부 하는 저로서는 정말 채식의 중요함을
절실히 느껴봅니다 감사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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