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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정신과 동물의 생명권/안성두교수
한채연 2009-07-19 10:54:53

불교정신과 동물의 생명권

/안성두 (금강대학교 교수)


1. 서구사상과 비교하여 불교를 대표적으로 특징짓는 것 중의 하나가 불살생이라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왔고 또 불교인 스스로도 이를 처음부터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불살생은 이미 초기불교부터 계와 선업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간주되어왔고 이 조항은 승려뿐 아니라 재가신자에게도 타당한 것이었다.

그리고 불살생의 대상이 사람 뿐 아니라 동물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율장에 있어서 명시되고 있었기 때문에 동양사상에 호감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이를 신은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을 위해 동물들은 만들었다는 성서적 사유와 비교하여 동양사상, 특히 불교가 가진 생명의 평등성의 관점을 지지하는 근거로서 언급하곤 한다.

하지만 현금 우리 사회를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살생의 문제, 특히 동물의 살생의 문제를 서구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또 그런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의 하나로서 우리나라에 있어 채식주의자의 비율이 서구의 그것과 비교해서 매우 낮은 것을 볼 때, 과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러한 전통이 아직도 살아있는가를 되묻게 된다.

불교가 사회의 지배적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는 아시아의 여러 국가에서 조차도 광범위한 어류의 남획과 동물의 사육공장화에 대해 항의하는 목소리가 드물다. 오히려 서구사회에서 항의의 목소리가 더 높은 지경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발적으로 이제까지의 안락한 소비문화를 바꾸고 생태학적으로나 불교적으로 받아들일만한 생활방식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운동은 비록 없지는 않으나 아직도 불교계의 일부분에 국한되어 있을 뿐이고 사회전반으로 확산되기에는 역부족인 듯이 보인다.

현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살아가는 불교도에게 있어서 조차 연기의 교설은 동물들의 불행한 생존을 당연시하는 이론으로, 또 육도 윤회로서의 중생의 존재론적 위계성은 먹이사슬의 위계성으로 재포장되어 불교도의 양심을 은폐하는 방식으로 일상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이하에서는 불교경전에 나오는 동물의 살생과 관련된 서술을 슈미트하우젠 교수의 논문들을 중심으로 테마화하고 이를 나름대로 정리해서 불교의 전통적 기술들이 보여주는 정신적 태도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동물의 권리에 대한 현대학계의 논의를 간단히 소개하고 이런 논의가 불교정신의 배경 하에서 어떻게 사회적 실천에 옮겨질 수 있는지를 논의해 보자.

2. 동물의 살생과 관련된 불교문헌의 기술들

- 불교가 다양한 지역과 상이한 문화적 지리적 조건 하에서 발전해 왔음을 고려할 때, 불교전통의 육식에 대한 태도는 획일적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다만 불교적 정신성을 고려하면서 이들 문제가 현재 우리의 문제와 관련되어 어떻게 대답될 수 있는지를 고려하는 것이 상황론적으로 타당하리라 보인다. 이하가 불교전통에 보이는 식육에 대한 중요한 논의의 포인트일 것이다.

- 동물의 세계에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이 존재의 가강 기본적 구조로서 인식되고 있다 (T 3: 467b18-23). MN II 169에서 이러한 생존방식은 불행하고 비도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 이상적 세계에서 예를 들어 色界나 淨土에서 동물의 존재는 설정되지 않거나 육식동물은 언급되지 않았다.

- 본생담의 석가모니가 전생보살이었을 때의 이야기에서 (시비왕 이야기 또는 굶주린 암호랑이 이야기) 보살의 영웅적 행위는 이런 먹이사슬을 이타적 자기희생을 통해 극화되고 있지만, 먹이사슬은 불가피한 하나의 자연적 사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 살생의 문제와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왜 동물의 살생만이 문제되고 식물의 파괴는 언급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도 내지 불교의 종교적 관념에서 식물도 과연 중생의 범위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보인다. 자이나의 경우 또는 동아시아 전통에서 일체 존재가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일체 속에 식물은 물론 산하대지도 포함시키는 전통이 있다. 이런 해석의 경우, 생태학적 윤리학의 측면에서 부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겠지만, 먹어야만 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게는 해결할 수 없는 윤리적 딜레마를 안겨줄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율장에서 식물을 손상시키는 행위는 가벼운 죄로 간주되었지만, 식물에게 과연 감각이 있는지의 여부는 윤리적 측면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육식과 관련해 경전에 나타난 불교적 정신성은 무엇인가?

- 출가승려의 경우 초기에 사문적 전통에 따르고 있었다. 다시 말해 탁발을 통해 食의 문제를 해결하는 삶의 방식을 지키고 있다. 탁발해서 얻은 음식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잉여물’로 간주되었고 그것이 달콤한 고기건 생선이건 불교도는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기본적 태도를 갖고 있었다.

여기서 남은 ‘고기’와 동물의 살생의 문제는 처음에는 문제거리가 되지 않았다. 다만 교단이 형성되고 재가신자로부터 초청받는 일이 빈번해졌을 때 제한적으로 “세 가지 점에서 청정한” 경우에, 즉 보거나 듣거나 자신을 위해 도살되었다는 의심이 없을 경우 제공된 고기를 먹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는 慈心을 증대시키기 위해 도입되었다고 MN I 368-371은 설명된다.

- 육식을 금욕적 이유에서 금지시키려는 시도는 있어왔지만, 초기시기에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 다만 무덤가에서 부정관 등을 수습하는 승려에게는 배회하는 야수로부터 공격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철저한 육식의 금지가 주문되었다.

- 이러한 주류전통에 반해 불교에서 철저한 육식의 금지가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약 400년경 편찬된 <대승 열반경>. <능가경> 등 일련의 대승경전에서 부터였다. 이것이 당시 인도 바라문계급의 철저한 채식문화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능가경>에서 “비불교도조차 고기를 먹지 않는데, 자비를 기본교의로 하는 불교도들이 어떻게 고기를 먹을 수 있겠는가” 하는 문장에서도 엿볼 수 있다.

여기서의 그 핵심논점은 식육이 자심을 해치며 따라서 보살행을 장애한다는 점에 있다. 식육하는 사람이 내뿜는 공격성이 다른 동물들을 두렵게 하고 그들의 신뢰를 얻을 기회를 봉쇄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로서 <앙굴리말라경>은 모든 존재가 무시 이래 언젠가 부모였던 적이 있거나 가까운 친척이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부모나 친척의 고기를 먹는 것과 같다고 간주한다. 또는 일체 중생은 여래장을 갖고 있기에 그들의 본성은 자신의 본성과 하등 차이가 없으며, 따라서 그들의 고기와 자신의 고기는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 보다 윤리적으로 중요한 주장이 <능가경>에서 제출되고 있다. 육식을 함에 의해 고기의 공급이 가능케 되기 때문에 식육자는 간접적으로 살생에 관여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復次 大慧!凡諸殺者,為財利故、殺生屠販。彼諸愚癡食肉眾生,以錢為網而捕諸肉。彼殺生者,若以財物,若以鈎網,取彼空行水陸眾生,種種殺害,屠販求利。(T 16: 514a; LAS 252,15-253,9) 만일 고기의 소비자가 살생에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고 살생에 공동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살생자와 동일한 업과를 가진다는 의미이다. <능가경>은 중생을 유일한 아들로 보는 대비심에 의해 육식하지 말 것을 제안한다.

불전에 나타난 이들 기술들은 각기 상이한 지역과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교학적 배경에 따라 식육의 문제를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진술들을 시공의 맥락을 떠나 자체적으로 항구적이고 ‘불변하는’ 가치를 가진 것으로서 간주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無常의 관점에 서 있는 불교적 정신성에 부합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경전들이 읽고자 하는 맥락을 먼저 고려하는 것이 낱낱의 구체적 진술들을 맥락에서 분리시켜 해석하는 것보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식육의 문제와 관련하여 경전들이 말하는 사항들을 요약해 보자.

1) 초기불교에서 먹이사슬에 얽매여 먹고 먹히는 동물적 삶의 방식은 비록 비극적인 것이지만 ‘자연적’인 것으로서 인정되었다.

2) 사문적 삶의 방식에 따라 초기불교는 탁발에 의해 식생활을 해결. 여기서 가장 현실적 문제로서 부딪치게 되는 것이 고기를 공양받을 경우였다. 붓다는 인간은 먹는 것에 따라 그의 존재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유와 행동에 따라 존재가 결정된다는 중도적 사유방식에 따라 공양받은 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허용. 이런 태도는 당시 일면에서는 희생제의를 수행했던 바라문계급과 타면에서는 같은 사문전통에 속하면서도 철저한 채식을 준수했던 자이나교도의 태도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3) 종종 고행적 근거에서 육식의 포기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초기경전에 의하면 이런 해석은 부차적인 것이었을 뿐이다.

4) 본생담에 따른 보살의 영웅적인 삶의 방식은 이런 ‘자연성’을 극복하고 자기희생을 통해 윤리적, 정신적으로 초월하는 것이다.

5) 불교에 있어 본격적인 육식의 금지는 4세기 경 당시의 인도에 있어서 채식주의 식단의 지배적 경향과 관련되어 있다. 특히 여래장 계통에 속하는 대승경전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대승불교에서 식육을 거부하는 근거는 크게 ①보살행과 관련된 근거, ②죽인 짐승이 전생의 친척이라는 근거, ③일체중생이 여래장을 갖고 있다는 근거, 그리고 마지막으로 ④간접적 살생죄에 해당된다는 근거 등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식육과 관련된 불교의 입장이 여러 스펙트럼을 갖고 있음을 본다. 이를 실용주의와 공리주의. 직관주의와 연기론적 입장으로 구분해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화시켜 설명하자면 초기불교의 태도가 주로 실용주의적 관점에 서 있는 반면에 대승의 태도는 4)~5)의 두 입장을 통해 잘 드러나 있다고 보인다.

그리고 공리주의적 태도는 상기의 기술에 있어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불교윤리를 특징짓는 태도의 하나로서 역시 식육의 맥락에서도 충분히 고려될 수 있다고 보인다.

(a) 실용주의(Pragmatism)적 입장

실용주의란 실제적 결과가 지식과 의미와 가치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이론을 말하는데, 식육에 관련된 초기불교의 태도는 실용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보인다. 초기불교의 승려에게 있어 열반의 획득은 최고의 목표였고 그의 지식과 실천은 이것을 향하고 있다.

식육에 대한 절대적 금지조항을 갖고 있지 않고 실용적이고 유연한 방식으로 식육문제가 가진 난점을 피해갔던 불교의 태도는 탁발의 방식으로 무소유를 실천하면서 동시에 극단적 일부 사문전통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식육의 부정이 가진 부정적 방식으로 집착함(negative attachment)의 위험을 피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어떤 음식이든 주어진 것은 가리지 않고 먹었던 실제적 결과는 고기에의 탐착과 고기의 극단적 거부라는 두 극단의 회피라는 귀결을 가져왔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음식을 통해 필요한 자양분을 취함으로써 정신적으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에너지를 얻는다는데 있지, 어떤 종류의 음식을 거부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에 따라 정신적 완성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인식이다.

이러한 중도적 태도에 의거하여 식물은 중생의 범주에서 배제될 수 있었고 나아가 작은 미생물 등의 살생도 큰 죄로 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b) 공리주의(Utilitarianism)적 입장

공리주의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으로 요약되지만, 일체를 고통으로 보는 불교에 이를 적용시켜 본다면 ‘최대다수의 최소고통’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윤리는 많은 경우 공리주의적 입장을 취하지는 않지만 몇몇 경우 양적 기준이 문제될 때 공리주의적 관점을 취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보살이 불가피하게 살생해야할 상황에 부딪쳤을 때 그는 다수의 안녕을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도록 권고받는다. 전통적으로 티벳인들은 작은 동물을 여럿 도살하는 대신 큰 동물 한 마리를 도살하는 것이 낫다고 설명하는데 이것도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설명 가능할 것이다.

(c) 직관주의적 입장

불교에서 동물은 결코 데카르트가 주장했던 바와 같이 감각이 없는 하나의 자동기계로서 간주된 적이 결코 없었다. 모든 존재는 업에 따라 윤회하기 때문에, 성자가 아닌 한 누구도 내세에서 동물적 존재로 떨어질 가능성을 절대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따라서 윤회적 관점에서 모든 존재의 미래의 존재양태의 불확정성을 고려할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관점은 생사를 벗어나기를 갈구하든지, 아니면 생사를 불가피한 당연할 사태로 받아들이면서 그 속에서 즐거움을 추구하든지, 아니면 모든 동류 중생에 대해 그들이 죽어야 한다는 점에서 나와 동일한 본성을 갖고 있음을 직시하면서 공성의 인식과 함께 중생에 대한 동질감(solidarity)을 강화시켜 나가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첫 번째 방식은 대승에 있어 성문의 수행도로 간주되었고, 두 번째는 icchantika라고 규정되었으며, 마지막이 보살의 행동방식으로 설정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방식은 다시 중관-유식적 사유와 여래장적 사유에 따라 구분될 수 있다고 보인다.

이 방식이 직관적 방식이라는 것은 윤회적 인식에 근거할 때 생겨나는 인식이라는 점에 있다. 인도불교적 시간관에 따라 생사윤회를 無時 이래라고 받아들일 때 윤회하는 모든 중생들은 언젠가 자신의 부모형제였던 적이 있었다고 받아들일 충분한 근거가 있게 된다.

초기불교에서도 (예를 들면 SN II 189f.) 이러한 정신성은 찾아볼 수 있지만, 이것이 보살행과 구제방식의 주요이유로서 제시된 것은 대승에 이르러서이다. 이런 관점에 서 있을 때, 우리는 식육의 방식을 윤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택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동체대비’는 고결한 천상적 보살만이 추구해야 할 추상적인 과제가 아니라 죽어야만 하는 모든 현존재가 가져야할 윤리적 정언명법으로 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직관주의적 입장의 근거를 윤회 밖에서 찾고자 할 경우 아마 우리가 의지해야할 유일하고도 윤리적 근거는 ‘네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도 베풀지 말라’라는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윤리적 황금률에 의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런 황금률이 초기경전에서 명백히 서술되고 있음을 본다.

나는 살고자 하고 죽지 않기를 바라며 행복하기를 바라고 고통을 피하고자 한다. 만일 누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면 그것은 내게 고통스러울 것이다. 만일 내가 [마찬가지로] 살고자 하고 죽지 않기를 바라며 행복하기를 바라고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다른 중생을 죽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고통스러울 것이다.

나에게 고통스러운 것은 다른 존재에게도 고통스러운 것이다. 어떻게 내가 스스로에게 고통스러운 것을 다른 존재에게 가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으로 우리는 살아있는 중생의 살생을 멀리하고 타인에게도 그렇게 권해야 한다.

위의 기술은 슈바이처박사가 말했던 바와 같이 "나는 살고자 하는 존재 속에서 살고자 하는 존재"라는 인간조건을 연상시킨다. 또는 보다 직접적으로 모든 존재가 고통이라는 조건에 의해 결박되어 있다는 인식 위에 대승보살행을 정초시키고자 하는 샨티데바의 설명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인간만이 해탈적 통찰을 얻을 위치에 있다는 특수성은 다른 동료 중생들에게 대한 해악과 괴롭힘, 살생행위를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

(d) 연기적 관점

식육자도 살생에 공동책임이 있다는 <능가경>의 설명은 초기불교의 문제맥락을 넘어 현대사회에서의 소비문제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능가경>의 설명은 분명 생산자와 소비자의 문제를 함축하고 있고, 경의 관점은 본질적으로 소비자와 생산자, 생산물의 관계가 서로 의존해 있다는 相依性의 통찰에 근거한 설명이기 때문에 이를 (중관학파의 의미에서) 연기적 관점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식육자가 살생행위에 대해 공동적인 업보 내지 공동책임을 갖고 있다면 소비자로서의 식육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능가경>은 이어지는 설명에서 붓다는 대비를 선행요소로 함에 의해 모든 중생을 자신의 유일한 아들로 본다고 말함으로써 소비자의 자발적인 육식의 포기야말로 ‘불선한’ 연기적 관계를 변혁할 수 있는 계기라고 본다. 각성된 개인의 윤리적 행위가 공급-소비의 메카니즘에 의해 조절되는 시장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구조를 바꿈으로써 일거에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근시안적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또는 市場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또 그 시장은 끊임없이 확대되어야 한다고 믿는 신자유주의적인 경제학자들에게는 사회의 경제구조를 단박에 허물 수 있는 위험한 선동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윤리적으로나 환경론적 관점에서 지금과 같은 소비문화를 지구가 감당해 낼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고 있다고 본다면 가장 좋은 해결책은 개인의 자발적인 절제 내지 포기일 것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불교경전에서의 이런 다양한 관점을 염두에 두면서 어떻게 이런 불교의 윤리적 태도가 현대사회에서 불필요한 동물의 살생과 동물의 ‘사육공장’에서의 고통을 경감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고찰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먼저 동물들에게도 생존권이 있는지에 대한 최근의 여러 논의를 간단히 스케치해 보겠다.

3. 동물의 권리(Animal rights)와 관련된 현대사회에서의 논의

Animal rights란 동물들의 가장 기본적 욕구와 권리가 인간의 그것처럼 제공되어야 한다는 관념. 이하 http://en.wikipedia.org/wiki/Animal_rights#Development_of_the_idea 참조.
동물들은 더 이상 소유물이나 음식, 가죽의 제공자로서가 아니라 생명체의 (중생의!) 도덕적 가족의 일원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이들 동물의 권리옹호론자들은 주장한다.

이들은 Animal right의 사회적 인식이 동성애자들이 약 25년 전에 당했던 그런 사회적 상황에 와 있다고 여긴다. 현재 180여개 미국의 Law school 중에서 약 100여 곳에서 Animal rights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서구사회에서는 처음으로 스페인이 2008년 Animal rights를 도입했다.

Animal rights의 권리장전은 1972년 호주의 철학자인 Peter Singer의 Animal liberation에 의해 출발한다. 여기서 그는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동물의 권리를 옹호했다. 그는 동물이나 인간이 자연적 또는 도덕적 권리를 갖고 있다는 관념을 부정하고 대신 관심의 평등한 역할(equal consideration of interests)을 제안했다.

그는 행위는 기쁨을 증대시키고 고통을 감소시키는 한에 있어 도덕적으로 옳다는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중요한 사항은 동물들이 사유하고 말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그들도 감정을 갖고 있고 따라서 고통을 느끼는가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이익의 손상이 다른 존재들의 기본적 이익의 손상과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할만한 어떤 논리적, 도덕적 생물학적 근거도 없는 것이다. (유명한 샨티데바의 이타심을 실현하기 위한 아래 언급된 두 명제와 비교!). 어떤 한 존재의 이익은 우주적 견지에서 다른 존재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이후 Animal rights 사상의 발전에 있어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반면 Animal rights가 과연 가능한지에 대한 비판자들은 동물들은 사회적 계약이나 도덕적 선택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따라서 권리의 담지자로서 간주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권리는 의무를 포함하고 있으며, 나의 권리는 타인에게 의무가 된다.

따라서 권리와 책임은 인간조건에게 특유한 것이고 따라서 이를 인간을 넘어 다른 종으로 확대할 수는 없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동물을 하나의 ‘자원’으로서 사용하는데 대해 어떤 오류도 없으며, 다만 동물에 대한 불필요한 학대를 방지하면 족할 뿐이라고 간주한다. (Animal welfare).

- 샨티데바(寂天)는 <입보리행론>에서 자타의 동일성에 의거하여 다른 존재의 고통이 결국 자신의 고통과 존재론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간주하고, 자타 상환법에 의거하여 적극적으로 자신의 기쁨을 타인의 고통과 교환하려는 이타행적 앙가쥬망을 불교윤리의 두 축으로 삼았다. 동물들이 고통을 느낀다는 점에서 인간과 하등 차이가 없다고 지적하면서, 동물이 이러한 고통의 회피라는 평등한 목표를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 출발하는 공리주의의 입장은 샨티데바의 첫 번째 논지와 유사함.

- 그러나 먹이사슬이라는 현실적 상황에서 P. Singer 등의 입장에 따를 때 공리주의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의문. 더욱 콘라드 로렌츠와 같은 일부 생물학자들은 생태적 관점에서 먹이사슬이 種을 건강하게 존속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 물론 여기서도 개체로서의 존재와 생태학적 種을 구별해서 제한해서 사용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불교가 전통적으로 전자만을 인정했다는 점도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

- 현실적 차원에서 동물들의 행복권을 인정하는 것. 불필요하게 학대받지 않을 권리를 제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더 효과적이고 현실적이지 않을까 하는 문제지기도 타당할 것.

4. 현실적이고 중도적인 대안의 추구

자이나교 성자들의 최고의 이상적 상태는 굶어 죽는 것이다. 그것은 아힘사를 실천하는 가장 적극적 행위였다. 하지만 그런 행위가 현대인에게 어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열반 내지 정각의 획득을 목표로 하는 불교의 수행자들에게도 이상적인 방식은 결코 아닐 것이다.

욕계는 성적 욕망과 먹으려는 욕망 그리고 수면욕으로 특징지어진다고 간파했던 불교에 있어서 이 욕계에서 살아가는 존재는 무엇인가를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다. 초기불교는 이 인간존재의 한계성을 보면서 그 먹거리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집착하지 않고 주어지는대로 먹으면서 보다 높은 정신적 완성이라는 목표를 중시했다고 보인다.

반면 대승에 있어서 불살생은 하나의 윤리적 규정일 뿐 아니라 대승불교를 특징지우는 정신적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착보살의 전기에서 잘 보여지듯이 해탈적 통찰의 내용이 공성의 인식을 통해서 뿐 아니라 고통받는 중생들에 대한 대비심을 통해 채워진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대승불교는 여래장 사상에 입각하여 일체중생의 동질성에 대한 인식을 통해 채식주의적 입장을 강화시켜 나갔다고 보인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현금 우리나라 불교도들의 태도는 초기불교이든 대승불교이든 불교전통으로부터 어떤 심각한 영향도 받고 있지 않다고 보인다.

근래 동물의 생명권에 대한 가장 극적인 사건의 하나가 천성산 도룡농 보호를 위한 어느 비구니스님의 단식일 것이다. 필자는 이 사건에 대해 가부를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러한 태도가 불교전통과 합치되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적은 있다.

일체중생을 자신의 유일한 아들처럼 보아야 한다는 대승의 가르침에 선다면 분명 그러한 항의는 유효할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정신적 완성에 중점을 두면서 교단에 대한 사회적 평판에도 주의를 기울이면서 극단적 행위를 자제했던 초기불교의 입장에서는 분명 많이 이탈된 것이라고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천성산 도룡농 보호도 좋지만 동물들의 생명권이나 환경권 보호와 같은 문제는 본질적으로 <맹자> <穀粟章>과 같은 맥락에 서 있을 때 보다 많은 사회적 지지를 얻을 수 있고 나아가 불교적 윤리성을 사회에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관점도 여러 스펙트럼이 있으며, 이것들을 포섭해서 불교적 입장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때, 이것이 극단적인 비타협적 태도보다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보인다.

이를 감안하면서 필자는 자기의 의향과 의도를 청정하게 계발하는 등의 문제에 있어서는 대승의 정신적 태도를 따르고,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초기불교의 중도적 입장을 따르는 것이 가장 원만한 태도라고 하는 인상을 받는다.

이하에서는 실제 동물의 살생이나 식육과 관련하여 먹이사슬의 한쪽 끝에 서 있는 인간이 그의 힘을 남용하지 않고 소비하는데 있어 권장될 수 있는 몇 가지 태도를 나열해 보았다.

- 동물의 행복추구권을 인정하는 범위에서 불필요한 고통을 제거하려는 시도:
예를 들어 가축을 사육할 때에도 동물공장 식의 집단사육을 피하기. 도살장으로 수송할 때 보다 편안하게 수송하고 도살할 때에도 고통을 최소한으로 주기.

- 동물공장에서 사육한 고기 먹지 않기:
정상적으로 사육한 고기를 구매하기. (소비자로서의 공동책임성을 의식하며)

- 남은 음식 최소화하기:
모범으로서의 사찰의 잔반 없애기. 제공된 것은 무엇이든 버리기보다는 먹는 방식을 택했던 초기불교의 탁발정신.

- 환경론적 관점에서의 육식문화의 한계와 파괴성을 시민들에게 인식시키기:
그린피스 등의 환경단체에서 주도하는 종으로서의 동물보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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