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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해방과 불살생/신성현교수
한채연 2009-07-19 10:57:17

동물해방과 불살생

/신성현(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Ⅰ. 들어가며

『三國遺事』 제5권 感通제7 金現感虎條에는 인간과 호랑이의 사랑이야기가 나온다. 여인으로 변한 호랑이가 郎君 김현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고 그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바쳐 벼슬에 오르게 한 이야기를 적고 있다.

우리는 古典을 통하여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만나곤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설정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우리 산하에는 더 이상 호랑이가 살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표범, 반달 곰, 늑대, 여우 등도 종적을 감추었다.

호랑이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동물원이다. 좁은 우리에 갇혀 눈빛 잃은 채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는 더 이상 맹수의 제왕이 아니다. 곰 또한 철창에 갇혀서 인간의 보양을 위해 배에 호스를 박고 있는 모습은 처참하다 못해 슬프기 조차하다.

이들은 인간의 번영과 풍요를 위하여 그들의 삶의 터전을 고스란히 내주어야 했다. 살아남은 야생동물은 엽총에 맞거나 올무에 걸려 죽거나 방황하다 길에서 차에 치어 삶을 마쳐야 했다.

소나 닭 등 가축들의 삶이라고 해서 이보다 더 낫지 않다. 무자비한 상업주의에 의한 패스트푸드화는 인간을 위한 것인 만큼 그들은 더욱 비참해져야 했다. 우리는 패스트푸드에 쓰여질 쇠고기나 닭고기를 값싸게 생산하기 위하여 소나 닭의 최소한 권리마저도 빼앗고 있다.

보다 싼 가격으로 식용으로서 사용되기 위해서는 소나 닭은 더 이상 동물이 아닌 하찮은 소모품일 뿐이다. 소나 닭은 공장식 농장(factory farm)에서 사료를 고기로 전환시키는 기계와 같다. 소는 한번 제대로 초지를 밟아 볼 기회마저 박탈당한 채 삶을 마친다. 닭 또한 행복한 달걀을 낳아 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또한 쥐, 기니피스, 토끼 등은 실효성 없는 실험으로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다. 아무런 죄의식없이 인간에 의해 자행되는 행위들로 동물은 아프고 고통스럽다. 인간이 동물을 고통스럽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과 동물이 다르다는 생각 때문이다. 동물은 인간을 위한 도구일 뿐(이며 그러기에) 倫理나 道德의 영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이러한 동물의 인식에 대한 비판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비판의 기본 핵심은 동물이 단순히 인간을 위한 도구적 가치만 지니는 존재가 아니라 본질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러한 동물에 대한 인식은 이미 불교에서 불살생과 관련하여 다원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Ⅱ. 우리가 동물이다.

우리가 동물을 대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우리가 동물을 다루는 방식들, 즉 식사, 사육방법, 많은 과학영역에서의 실험과정의 대상, 야생동물의 사냥, 덫 놓기, 모피 옷, 서커스, 로데오, 동물원과 같은 오락영역 등 그 어느 영역에서도 그렇다. 그 한 예를 보자.

미국 환경청(EPA) 등 정부기관들은 이런 화학물질의 안정성을 검증하기 위해 쥐/ 생쥐, 기니피스, 토끼, 개, 고양이, 암탉, 물고기 등을 사용하는 동물실험 프로그램을 수없이 많이 진행한다.

이 실험들에서 동물들은 위에 외과적으로 튜브를 삽입하는 등의 거친 방법을 통해서 강제적으로 주입되는 화학물질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안된다. 실험자들은 동물들에게 유독한 공기를 마시게 하고 화학물질을 주사하거나 피부에 바르며, 눈 속에 넣기도 한다.

생식에 관한 연구의 경우, 임신 중의 동물들에게 화학물질을 투여하여 새끼를 유산시키고, 쥐와 토끼의 경우 태아의 무게를 재기 위해 출산 전에 어미의 자궁을 절제하여 해부하기도 한다.

또한 많은 과학자들이 인간에게 미칠 위험을 예견하는데 알맞은 실험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도 불구하고 EPA는 여전히 '치사량 50(LD50)' 실험을 시행하고 있다. 설정된 테스트 집단의 절반을 죽이는데 필요한 화학물질의 농도를 측정하는 이 잔인한 실험에서 동물들은 경련, 심한 복통, 발작, 떨림, 설사증세를 일으킨다.

생식기와 눈, 입으로 피를 흘리고, 걷잡을 수 없이 토하고, 자해를 하고, 미비증세를 보이고, 신장기능을 상실하고,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단 하나의 화학물질을 실험하기 위해 2,000마리의 동물이 그렇게 죽어간다.1)

여기에서 동물실험을 한 예를 들었지만, 인간이 동물에 대하는 방식은 잔혹하다. 인간이 동물에게 있어 이와같이 잔혹할 수 있음은 무엇 때문일까? 이는 人間이 형이상학적으로 동물과는 차별화되는 존재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은 西歐文明의 대부분 역사 속에서 보편적 가치관으로 부동하게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17세기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인간이 매우 특별한 존재이며, 그것은 인간만이 이 세상에서 마음(또는 정신)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마음을 가진 인간만이 사고하며 마음이 없는 존재는 당연히 생각하지 못하며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2)

우리가 동물을 대하는 방식은 이와같은 인간중심적 신념에서 비추어 본다면 당연하다. 이러한 신념은 인간의 복지와 번영을 위해서는 자연의 도구적 개발과 인간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한 착취, 파괴를 전적으로 정당화하며,3) 따라서 人間이 動物에게 자행하는 온갖 잔인한 행위를 합리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동물이다. 우리와 다른 동물과의 차이는 피터 싱거(Peter. Singer)가 지적하듯 종류의 차이(difference of kind)가 아닌 정도의 차이(difference of degree)일뿐이다.4)

인간은 지금까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할 기준을 찾아 나섰지만 그 어느 것도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예를 들어(서) 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한다는 사실이 주장되기도 했다. 그러나 갈라파고스 섬의 딱따구리는 나무의 틈 속에서 벌레를 파내기 위해 선인장 가시를 사용하고 있음이 관찰되었다.

다음으로 다른 동물이 도구를 사용한다고 해도, 인간만이 유일하게 도구를 만드는 동물이라는 사실이 주장되었다. 그러나 '구달'(Jane Goodall)은 탄자니아의 정글에 사는 침팬지가 나뭇잎을 씹어 물을 적실 스펀지를 만들고, 벌레를 잡을 도구를 만들기 위해 가지에서 잎을 훑는 것을 발견했다.

言語의 사용이 또 다시 인간과 동물의 경계라고 주장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침팬지와 고릴라는 귀머거리와 벙어리의 수화법을 배웠으며, 고래와 돌고래는 그들 나름의 복잡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5)

進化論에서 보아도 인간은 동물과 다르지 않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로부터 진화해 나왔다. 우리는 원숭이의 일종이다. 우리는 침팬지와 98.6%의 유전자를 공유한다. 유전학적으로 보면, 우리와 참팬지의 근친정도는 침팬지와 오랑우탄보다 더 가깝다. 인간과 침팬지는 공동의 조상으로부터 자연선택의 과정을 통해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자연선택은 흔히 '적자의 생존'(the survival of the fittest)이라 불린다. 그러나 이 문구가 이빨과 발톱이 범람하는 살벌한 자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진화론에 있어 적자란 단지 자손을 남기기에 가장 잘 갖추어진 개체들이 살아남고 번식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다른 원숭이들처럼 보다 넓게 말하면 영장류들처럼, 인간은 사회성을 가진 포유동물이다. 사회성을 가진 포유동물은 집단을 이루어 살아간다. 그리고 자기 새끼들을 돌본다. 이것이 이들이 수명을 다했을 때 자손을 남기는 방법이다.

그렇다고 사회적인 포유동물들 중에서 人間만이 利他的이라고 주장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예는 돌고래가 자기 집단에 속한 부상당한 동료를 생존할 수 있도록 돕는 방식일 것이다.

만약 돌고래가 수표면 위에 올라 올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부상당하게 되면 다른 돌고래들이 부상당한 돌고래 주변에서 집단을 이루어 그것이 숨을 쉴 수 있도록 수표면으로 밀어 올린다. 필요에 따라서는 같은 행위를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한다.

사회적 동물들은 또한 공유한다. 늑대와 들개는 사냥에 참가하지 않더라도 같은 무리에 속하면 고기를 가지고 돌아와 나누어준다. 침팬지는 잘 익은 과일이 있는 곳으로 서로를 인도한다. 침팬지 무리 전체가 과일이 풍성한 나무를 발견하게 되면 그들은 커다란 소리를 질러 1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는 다른 침팬지들을 불러 모은다.

사회적 동물은 위험을 서로 알려 주기도 한다. 매가 머리 위를 날아 지나가면, 검은지빠귀나 개똥지빠귀는 위험 신호를 보내서 같은 무리의 다른 새들이 도망갈 수 있도록 돕는다. 어쩌면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은 매의 주의를 끌지도 모르는데도 말이다.

더 놀라운 경우는 아프리카의 들개 때가 노리는 톰슨 가젤 영양의 경우이다. 가젤영양이 들개무리를 발견하게 되면 스토팅(stotting)이라는 이상한 뻣정다리 걸음을 취하며 달아난다. 이 행동은 경고 신호의 일종인 듯하다. 다른 가젤 영양들이 모두 즉각 도망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토팅은 평상시 보다 늦은 걸음걸이이다. 따라서 스토팅을 하는 가젤은 다음 놈들에게 위험을 알리기 위해 자신을 위험에 몰아넣는 셈이다.

동물들이 자신과 같은 종에 속하는 다른 놈과 싸우게 되는 경우, 그들은 일종의 규칙에 따라 행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규칙은 마치 중세의 기사들이 채용했던 신사적인 전투규칙과 같은 것이다. 늑대들끼리 싸움에서 한 놈이 우세하게 되면, 싸움에 진 놈은 굴종적인 몸짓을 한다.

예컨대 승리한 놈의 이빨에 자신의 목 밑부분을 들어내 놓는 시늉을 한다. 그러면 승리한 놈은 적의 결정맥을 찧어 놓은 대신에 상징적인 승리에 만족하며 총총 걸음으로 가버린다. 순전히 이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와 같이 고상한 행동들은 어리석은 짓이다. 왜 골칫거리를 남겨두는가? 훗날 또 다시 싸워 이긴다는 보장이 있는가? 승리한 늑대의 이익보다 더 큰 어떤 것에서 해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간단히 말해, 자연을 생사 투쟁이 일어나는 곳으로, 즉 자기가 먹을 것, 자기의 안전 그리고 성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놈을 제거해야 하는 곳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생물학이나 진화론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림이 아니다.

생존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의 유전자를 전하기 위해 우리가 넘어야 했던 난관은 위의 엉성한 그림이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생존하고 번식하기 위해서는 먹는 것과 짝짓는 행위이외에도 많은 것이 필요하다.6)

만약 人間과 動物간의 경계선을 그으려는 이와같은 시도들이 실제 사실들과 일치한다고 할지라도, 이들은 여전히 어떠한 도덕적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한 존재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거나 도구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 그 존재의 고통을 무시할 이유가 결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철학자들은 보다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동물들이 생각할 수 없고 추론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자신에 대한 어떤 생각 즉 자의식을 가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자의식(self-consciousness)이나 자율성(autonomy), 혹은 그와 비슷한 특징이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른 반박이 가능하다. 즉 많은 동물보다 더 자의식적이고 더 자율적이라고 내세울 수 없는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인간이 있음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완전히 자란 말이나 개는 하루나 일주일이나 한 달이 된 유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 더 잘 통하고 더 합리적인 동물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무슨 상관이겠는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성을 가지는가 그들이 말을 하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어느 정도로 얼마만큼의 고통을 겪는가이다.7)

動物들도 감각 능력과 고통을 지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대부분 인간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으나, 動物들은 원래부터 감각능력과 고통을 지각하는 능력을 그 자체 안에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다.

물론 어떤 인간도 동물들이 실제로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動物의 표정은 인간과 아주 유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동물의 표정(몸짓)은 건강하다든가 싫다든가 하는 것도 말해준다.

주위환경의 변화에 따르는 수많은 육체의 반응은 동물들도 인간과 비슷하다. 적어도 고등동물은 고통을 체험하는 해부학적 병리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물들은 이러한 근거만 보더라도 인간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動物에게 함부로 고통을 가해서는 안 된다.8) 오히려 동물을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Ⅲ. 불살생이 동물해방이다.

빨리어 『까라니야 메따 수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어떤 것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남김없이.
기다란 것이든 커다란 것이든 중간이든 짧든 미세하든 거칠든.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은 것이나 멀리 살든 가까이 살든.
이미 생겨난 것이든 생길 것이든 모든 뭇 생명(sattā)은 행복하여지이다.9)

불교에서는 모든 생명들이 행복해한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生命이 중요한 만큼 다른 생명도 존중하는 것은 당연하다. '法句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모든 것은 폭력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 이치를 자기의 몸에 견주어 남을 죽이거나 죽게 하지 마라.10)

殺生, 살생이 되는 원인, 또는 살아있는 존재(living being)의 파괴를 금지한다. 살아있는 존재란 미물로부터 動物과 人間에 이르기까지 生命을 지니는 존재를 의미한다. 붓다는 다른 존재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의 소중함과 견주어 볼 것을 가르쳤다.

즉 佛敎에서는 生命을 빼앗는 것을 금기시한다. 우리에게는 다른 生命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고 아울러 우리의 生命도 보호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이는 누구나 죽음과 생명의 파괴로부터 벗어나려 하기 때문이다.11) 자신의 입장과 남의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만 해 보더라도 다른 생명을 가벼이 여겨 죽이거나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佛敎에서 不殺生의 근거는 명료하다.12) 불교에서는 출가자는 물론 재가자까지도 모두가 다른 生命을 죽이지 말고 愛護해야 함을 초기의 계목인 5계에서 명시할 만큼 강조하고 있다. 완성된 5戒의 빨리어 조문은 다음과 같이 不殺生戒를 첫머리에 밝히고 있다.

殺生을 떠나는 戒를 받아 지키겠습니다.(pāṇātipātā veramaṇī-sikkhāpadaṃ samādiyāni)

이 문장에서 보이는 빠나(pāna sk prāṇā)는 有情(a sentient being)을 가리키지만, 보다 높은 차원 궁극적 의미는 정신적 생명 즉 생명력이다. 有情이 존재하지 못하게 하는 것, 생명을 앗아가는 것이 바로 殺生이다.13)

물론 不殺生은 佛敎에서만 설해졌던 용어는 아니다. 붓다 당시의 印度 타종교에서도 不殺生을 밝히고 있다.14) 그러나 不殺生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불교는 다른 宗敎와 차별화된다. 󰡔따라카타다하가따(Telakaṭāhagāthā)󰡕에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보인다.

“생명이 있는 존재를 죽이는 자는 다음 생애에 마치 아도니스(Adonis)와 같이 삶과 부귀와 아름다움 등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할 지라도 인생의 황금기인 어느 날 갑자기 죽을 수도 있다."15)

이는 殺生하는 행위가 業을 짓는 것임을 보여준다. 󰡔中部 니까야󰡕에서는 不殺生이 業과 輪廻를 짓는 일임을 보다 명확히 보여준다.

“여기에 동자야! 어떤 여인이나 남자는 살생하는 자이다. 그는 포악하여 손에 피를 묻히고 있으며 살육하는 일에 집착하고 있으며 생명과 존재들에 대해 친절함이 없는 자이다. 그는 이와같은 일을 실천하고 실행하였기 때문에 몸이 부서져 죽은 뒤 (즐거움으로부터) 멀어진 곳 또는 나쁜 곳 또는 (아래로) 떨어져 있는 곳 또는 지옥에 태어나게 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사람의 몸으로 태어난다고 해도 태어나는 곳마다 그 수명이 짧게 될 것이다. 따라서, 동자야.! 짧은 수명으로 이끄는 길은 살생인 것이다. 포악하여 손에 피를 묻히고 살육하는 일에 집착하고 생명과 존재들에 대해 친절함이 없는 살생이 그 길인 것이다.16)

佛敎는 다른 宗敎보다 더 넓은 도덕적 지평에서 不殺生戒를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種을 넘나들며(cross-species) 輪廻한다는 믿음때문에 동물의 生命에 대한 존경마저도 나타난다고 지적한 학자도 있다.17)

붓다의 전생을 다루는 󰡔자타카󰡕에서는 다양한 설정을 통해 동물의 형상으로도 존재했던 붓다의 이야기들이 나온다. 그 중에는 동물의 형상을 한 붓다가 굶주린 동료의 배를 채워 주기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포기하는 이야기도 있다.

이같은 인간의 삶은 인간 이외의 삶과 연결되어 있으며, 種들의 경계를 뛰어 넘는다는 점을 輪廻로 설명함으로써 모든 유형의 생명들 사이에서의 연관성을 제시하고 있다. 『자타카』의 이야기는 동물도 마찬가지로 도덕적 의식을 가지고 윤리적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 이외의 種을 도덕적 존재로서 강조하는 것은, 인간과 다른 종들 사이에 놓여있을 수도 있는 절대적인 구분을 약화시켜 준다. 佛敎的 관점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동시에 모든 유형의 生命體들 역시 상호간 연결 고리를 맺고 있다.18)

그러기에 佛敎에서는 당연히 실천적 戒律로서 殺生을 금하여 사람이든 動物이든 모든 생명있는 존재의 殺生을 금한다. 구체적으로는 살생하는 행위를 멀리하여 떠나라고 가르친다. 不殺生戒를 지니는 자만이 진정한 우바새임을 밝히고 있다.19)

특히, 比丘 250戒, 比丘尼 348戒에서는 不殺生과 관련한 조목이 나타나는데, 직접적으로 동물의 살생을 금지하는 奪畜生命戒마저 보이고 있다. 어떤 비구가 고의로 축생의 목숨을 끊으면 바일제이다.

… 축생이라 함은 변화하지 못하는 것이요, 그의 목숨을 끊는다 함은 자기가 끊거나 사람을 시켜 죽이거나 심부름꾼을 보내거나 심부름꾼이 가고 오면서 죽이거나 심부름꾼을 거듭 보내서 죽이거나 자기가 심부름꾼을 구하거나 사림을 시켜 심부름꾼을 구하거나 자기가 칼 가질 사람을 구하거나 사람을 시켜 갈 가질 사람을 구하거나, 몸의 형상과 입으로 말하거나 몸과 입으로 하거나 심부름꾼을 보내서 시키거나 글을 보내서 시키거나 함정을 놓아죽이거나 항상 의지하는 곳에 칼을 놓아 두거나, 독약이나 죽이는 기구를 앞에 놓아두거나, 이와같은 방편을 하거나, 그 밖에 다른 방법으로 축생을 죽이려 하여 죽이면 바일제이며, 방편으로 죽이고자 했으나 죽이지 않으면 돌길라이다.20)

不殺生은 大乘佛敎에 들어서 더욱 강조된다. 大乘의 戒律을 가장 잘 보여주는 󰡔梵網經󰡕에서는 生命있는 존재의 가치를 여실하게 보여주는데, 10重戒의 처음에 不殺生戒를 설명하고 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불자들아! 직접 죽이거나 남을 시켜서 죽이거나 방편을 써서 죽이거나 칭찬을 해서 죽게 하거나 죽이는 것을 보고 기뻐하거나 주문을 외워서 죽이는 그 모든 짓을 하지 말라.

죽이는 因이나 죽이는 緣이나 죽이는 방법이나 죽이는 업을 지어서 온갖 생명있는 것을 짐짓 죽이지 말아야 한다. 보살은 항상 자비로운 마음과 효순하는 마음을 내어 모든 중생들을 방편을 다해 구호해야 하는데 도리어 제멋대로 하며 통쾌한 마음으로 산 것을 죽이는 것은 보살의 바라이죄가 된다.21)

根本律藏에서는 比丘 比丘尼戒에서 第1戒가 婬戒인데 반하여 大乘佛敎의 『梵網經』에서는 不殺戒를 第一戒로 한다.22) 󰡔梵網經菩薩戒本疏󰡕에서는 不殺生戒를 제1戒로 제정한 뜻을 다음과 같이 종합적인 견지에서 설명한다.

생명을 끊는 것은 業道를 무겁게 하기 때문이고,
대비심을 어겨서 해치기 때문이며,
육도의 모든 중생이 모두 나의 부모인데, 길러준 은혜를 등지는 것이기 때문이고,
수승한 緣을 어그러지게 하기 때문이며,
일체중생은 불성이 있어서 모두 장래에 法器가 될 것이기 때문이며,
보살의 無畏施를 어겨서 잃기 때문이며,
四攝行을 어그러지게 하기 때문이고,
손해가 너무 크기 때문이며,
은혜에 보답하기 위함이고,
 법이 그러하기 때문이니, 삼세제불의 家業의 법이 그러하니 해칠 생각을 하지 않고 중생을 이익케하는 까닭 이다.23)

여기에서 모든 衆生을 모두 내 부모로 여긴다는 것 등은 바로 緣起論的 生命觀의 입장에서 모든 존재를 바라보는 것이다. 不殺生의 근본이 이와같은 연기적 생명관에서 나온 것임을 인식할 수 있다. 10重戒가운데 제1 不殺生戒는 48輕戒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제3 고기를 먹는 것을 경계하는 계(食肉戒).24) 제10 살생하는 기구를 쌓아 둠을 경계하는 계(畜殺具戒),25) 제11 전쟁을 일으켜 서로 쳐서 많은 중생들을 죽이는 것을 경계하는 계(通國使命戒), 제14 불을 놓아 태움을 경계하는 계(放火焚燒戒), 26) 제20 放生을 행하여 중생을 구하지 않음을 경계하는 계(不行放救戒),27) 제32 중생을 해롭게 함을 경계하는 계(損害衆生戒)28) 등 人間뿐만 아니라 動物․植物에 까지 그 범주를 확대하여 생명은 보호되어야만 하고 나아가 生命을 적극적으로 살려야만 함을 강조한다. 불교는 이처럼 모든 계율에서 不殺生을 가르친다. 특히 대승에서는 단지 생명을 지닌 존재를 죽이지 않는다는 소극적 불살생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불교의 윤리적 삶으로까지 확대하여 실천하도록 하고 있다.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살생을 하지 말라는 한 것은 정신적, 물질적인 살생을 의미한다. 단순히 살생이나 살아있는 生物(자기 자신을 포함하여)을 해치는 행위를 피하는 것은 소극적인 면이며, 적극적인 면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다른 사람 그리고 모든 중생들에 대해 慈悲를 실천하는 것이다.

불교가 이처럼 철저하게 살생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제시하는 의도는 일체의 살생을 악으로 간주하여 비폭력, 不殺生을 생활화하기 위한 것으로, 그 반대되는 예시를 역설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즉 폭력의 실상을 직시하여 이를 범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하게 하는 데 있다. 이것이 초기의 율장인 󰡔四分律󰡕과 대승의 律藏인 󰡔梵網經󰡕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正法念處經󰡕에는 不殺生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떻게 살생하지 않는가? 만약 길을 가다가 개미, 지렁이, 누에나비, 두꺼비나 풀벌레 그 이외의 곤충을 보더라도 그것들을 피해 먼 길로 돌아 가야한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들을 보호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업과 과보를 믿어서 생사의 허물을 알고 生滅法을 관하는 것, 이를 不殺生이라고 한다.29)

여기에서 우리는 不殺生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원리가 됨을 알 수 있게 한다. 不殺生은 곧 자비의 근간이며, 이것은 자기와 남이 하나가 되는 不二的 認識에서 출발한다. 󰡔正法念處經󰡕에서 이를 자세히 살펴보자.

善이라고 하는 것은 살생을 떠나 세상의 모든 중생을 거두어 줌으로써 그들에게 두려움이 없게 하는 것이다. …… 모든 존재는 목숨을 근본으로 삼고 사람은 모두 제 목숨을 보호한다. 불살생은 곧 그 목숨을 주는 것이니, 만약 목숨을 준다면 모든 즐거움을 주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제일가는 보시는 목숨을 주는 것이니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은 천상에 태어나는 원인이 된다. 가장 훌륭한 계율은 목숨을 주는 것이다.30)

이렇듯 가장 훌륭한 계율은 곧 생명을 주는 것이다. 내 자신의 목숨이 소중한 만큼 남도 소중히 여겨 다른 생명을 아끼고 죽이지 않는 것이 바로 생명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不殺生의 가르침은 곧 慈悲에서 나온다. 이 불살생은 가장 위대한 業이고 정법의 종자이다. 생사에 헤맬 때에는 오직 불살생만이 귀의할 곳이 되고 구원이 되는 것이다. 생사의 어둠 속에 들어간다면 이 불살생을 등불로 삼아야 한다. 불살생을 자비라고 하므로, 올바른 생각으로 불살생의 훌륭함을 생각한다면(,) 마음에 늘 기쁨이 생겨날 것이다.31)

Ⅳ. 나오며

흔히들 사람들은 21세기가 文化의 세기가 되어야만 하는 당위성에 대해서 역설한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린다. 현대인의 관심은 오직 文明일 뿐, 文化는 우리의 단지 희망일 뿐이다. 도덕 윤리가 부재한 文明은 상업주의의 영향으로 온 생명을 파괴 상실 해체시키고 있다. 특히 우리 인간이 자행하는 동물에 대한 행위는 잔인하며 혹독하다. 지금 동물은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다. 인간은 동물과 사이의 형이상학적 단절을 믿어 왔으며 윤리적 고려의 대상에서 항상 배제시켜 왔다. ․언어․도구사용․ 이타성․ 이성 등을 인간 고유의 독자적 영역으로 믿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독자성은 단지 믿음일 뿐 허구임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다. 인간만이 言語를 사용하는 것도, 도구를 사용하는 것도 이타적인 존재가 아님이 밝혀졌다. 어느 경우에 있어서는 동물은 인간보다 더 이성적이다. 인간은 더 이상 신의 대리자도, 만물의 영장도 아니다. 인간은 생태계를 구성하는 단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동물의 한 종일 뿐이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한 종이 마구잡이로 행하는 동물에 대한 폭력을 더 이상 정당화시키거나 합리화시켜서는 안 된다. 또한 그들로 인하여 고통에 신음하는 동물을 방치하거나 외면해서도 안 된다. 現代倫理學에서는 動物들의 아픔에 대한 무관심과 무배려는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 한다. 우리의 작은 이익을 위해 그들의 큰 이익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가 행하는 고통으로 그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이미 불교의 불살생에서 밝히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아니 불교는 현대윤리학에서의 불살생의 논거보다 다원론적이며 종합적 견지에서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교에서는 동물의 고통 소멸뿐아니라 행복의 권리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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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릭스 파노 지음, 󰡔잔혹한 관행 -동물실험󰡕, 󰡔녹색평론󰡕통권 54호, 녹색평론사, p.98.
2) 마크 롤렌즈 지음, 윤영삼 옮김, 󰡔동물의 역습󰡕, 달팽이출판, p.20.
3) 박이문 지음, 󰡔자연, 인간, 언어󰡕, 철학과 현실사, p.22.
4) 피터 싱어지음, 황경식․김성동 옮김, 󰡔실천윤리학󰡕, 철학과 현실사, p.95.
5) 위와 같음.
6) 피터 싱어지음, 정연교 옮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 세종서적, pp.145~147.
7) 피터싱어지음, 황경식․김성동 옮김, 󰡔실천윤리학󰡕, 철학과 현실사, p.79.
8) 피터 싱어는 이익평등 고려의 원칙(the principle of equal consideration of interests)을 동물에게 적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9) karaniya metta-sutta (Buddha Vandana, 전재성 책임번역, 󰡔예불문󰡕, 한국빠알리성전협회, p.82.
10) 󰡔法句經󰡕129.
11) 󰡔열반경󰡕에서는 “비록 사람과 짐승의 귀함과 천함에는 차별이 있지만 생명을 보배로 여김과 죽음을 싫어하는 것 이 두 가지에는 전혀 차별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12) 水野弘元著作選集 第2卷, 󰡔佛敎敎理硏究󰡕, 春秋社, 1997, p.5.
13) H. Saddhatissa, Buddhist Ethics Essence of Buddhism, p.88.
14) 水野弘元著作選集 第2卷, 󰡔佛敎敎理硏究󰡕, 春秋社, 1997, pp.4~5.
15) Telakaṭāhagāthā Ⅴ.78:
16) Majjhima-Nikaya제3권제35경 Cula kammavibhanga Sutta pp.202~206(P.T.S) 󰡔中阿含󰡕170 「鸚鵡經」 (大正藏1, p.703下).
17) 데미언 키온 지음, 허남결 옮김, 󰡔불교와 생명윤리학󰡕, 불교시대사, p.57.
18) 박호남, 「현대사회에 있어서 불교계율의 의미」, 󰡔불교평론󰡕, 2003 여름.
19) Digha-Nikaya 제1권 제2경 Samanna-phala-Sutta[D.N.Ⅰ, pp.41~75.(N.D.P); pp.47~86 (P.T.S)]
20) 󰡔四分律󰡕第16卷 (大正藏22, pp.676下~677上).
21) 󰡔梵網經󰡕 「盧舍那佛說菩薩心地戒品」第10卷下(大正藏24, p.1005中).
22) 이에 대하여 部派에서는 자신의 解脫만을 추구하는 自利위주의 수행을 첫째로 삼기에 淫行이 輪廻의 원인이 된다고 하여 第1戒로 한 반면, 大乘에서는 衆生을 구제하고자 하는 利他의 修行을 강조하기에 不殺戒를 제1계로 둔 것이라고 法藏은 설명하고 있다.
23) 󰡔梵網經菩薩戒本疏󰡕제1권 「初篇 殺戒」제1(大正藏 40, p.609下)
24) “불자들이여! 어찌 일부러 고기를 먹겠는가. 어떠한 고기도 먹지 말아야 한다. 고기를 먹으면 큰 자비의 佛性種子가 끊기므로 모든 衆生들이 보고서 도망하나니, 그러므로 보살들은 모든 중생의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 고기를 먹으면 한량없는 죄를 짓나니, 일부러 먹으면 경구죄가 된다.”(󰡔梵網經󰡕 「盧舍那佛說菩薩心地戒品」第10卷下(大正藏24, p.1005中)).
25) “불자들이여! 일체의 칼, 몽둥이, 활, 화살, 창, 도끼 등 싸움하는 기구를 쌓아 두지 말 것이며, 짐승을 잡는 그물, 망, 덫 등의 살생 도구 일체를 비축하지 말지니라. 보살은 부모를 죽인 이에게도 오히려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하거늘, 하물며 다른 중생을 죽이겠는가? 만일 일부로 일체의 칼, 몽둥이 등을 쌓아 두는 자는 경구 죄를 범한 것이다.”(󰡔梵網經󰡕 「盧舍那佛說菩薩心地戒品」第10卷下(大正藏24, p.1005下)).
26) “불자들이여! 나쁜 생각으로 짐짓 큰 불을 놓아서 산과 들을 태우리요. 4월부터는 9월 사이에 남의 집과 도시의 승방이나 밭이나 사당이나 神堂이나 관청의 공공물을 불태우지 말며 일체의 주인있는 물건들을 짐짓 불태우지 말라. 만일 짐짓 불태우는 이는 경구죄를 범한 것이다.”(󰡔梵網經󰡕 「盧舍那佛說菩薩心地戒品」第10卷下(大正藏24, p.1006上)).
27)“世世生生 몸을 받아 상주하는 법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放生을 하도록 가르치고, 만일 세상 사람들이 畜生을 죽이는 것을 보거든 마땅히 방편으로 구호하여 그 고난을 풀어 줄 것이며, 항상 널리 교화하되 보살계를 강설하여 衆生을 제도해야 하느니라. 부모나 형제가 돌아가신 날에도 법사를 청해 菩薩戒와 經律을 강하여, 죽은 이의 복을 빌어 주면 부처님을 뵙고 천상이나 인간 세상에 태어나게 될 것이니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 이는 경구죄를 범하느니라.”(󰡔梵網經󰡕 「盧舍那佛說菩薩心地戒經」第10卷下(󰡔大正藏󰡕24, p.1006中))
28) “불자들이여! 칼과 몽둥이와 활과 화살 등을 쌓아두거나 판매하지 말 것이며, 저울 눈을 가볍게 하거나 되를 적게 하지 말며, 관청의 세력을 믿고 남의 재물을 빼앗지 말며, 해칠 마음으로 얽어매거나 남의 성공을 깨뜨리려 말며, 고양이․이리․돼지․개 등을 기르지 말지니, 만일 짐짓 범하는 자는 경구죄를 범하느니라.”(󰡔梵網經󰡕 「盧舍那佛說菩薩心地戒品」第10卷下(大正藏24, p.1007中)).
29) “云何不殺 若行道路見諸虫蟻蚓蛾蝦蟆及餘小蟲 捨避諸蟲 行於遠道 以慈悲心 護眾生故 信業果報 知生死過 觀生滅法 是名不殺生” (󰡔正法念處經󰡕제35권(大正藏17, p.206上)).
30) “所言善者 謂離殺生 攝取世間一切眾生 施與不畏 於現在世 人所讚歎 面色諸根 端正美妙 得長命業 若不殺者 則為羅剎鳩槃茶等 一切惡鬼能殺人者 及餘惡人能殺人者 於夜闇中擁護彼人 諸天常隨 觀察 擁護 身壞命終 則生善道天世界中 受妙果報 若勤精進願下中上三種菩提 隨願皆得 彼人若願聲聞菩提 得阿羅漢 入於涅槃 彼人若願緣覺菩提 得辟支佛 如是若願無上菩提 得正遍知明行足善逝世間解 無上士調御丈夫天人師佛世尊 一切諸法 命為根本 人皆護命 不殺生者 則施其命 若施命者 施一 切樂 第一施者所謂施命 如是思惟 生天之因 最勝戒者 所謂施命”(󰡔正法念處經󰡕제2권(大正藏 17, p.6下)).
31) “此不殺生最為大業 正法種子 行於生死 唯不殺生 為歸為救 入生死闇 不殺為燈 不殺生者 名曰慈悲
正念思惟不殺生善 心常生喜”(󰡔正法念處經󰡕제2권(大正藏17, pp.6下-7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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