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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생활에 관한 영성(기독교와 채식)/조성희
한채연 2011-09-19 12:04:56


식생활에 관한 영성(기독교와 채식)

/조성희

생활이 풍족해지면서 평균수명이 늘어났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더 많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각종 성인병에다가 알레르기성질환 신경성질환 등 예전에 드물었던 질병들이 요즘은 너무나 흔해져서 모두가 불안해하며 건강염려증을 앓고 있다.

연장된 수명이 건강한 삶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이에 사람들은 건강을 찾아서 자연으로 눈을 돌렸다. 요즘 사람들은 ‘자연과 건강이 하나’라는 사실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자연친화적인 삶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급격히 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이기도하다. 그들은 친환경먹을거리에 대하여 높은 관심을 보이며, 할 수만 있으면 시골에 가서 전원주택에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자연이 사람을 받아주기에는 상황이 너무 나쁘다. 사람으로 인하여 자연이 중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친화적인 삶은 단순히 유기농식품을 먹거나 시골로 거주지를 옮긴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또 다른 이기와 탐욕일 뿐이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오만을 버리고, 자연을 존중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만 가능하다. 자연을 이런 사람을 기꺼이 품고 생명을 공유한다.

1. 기독교와 자연친화적인 삶

「자연친화적인 삶은 기독교적인 삶의 중심이다.」 창조의 섭리와 구속 그리고 이웃사랑을 생각한다면 기독교인은 결코 이를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거의 모든 교회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이 명제에 대하여 기본적인 개념은 물론 관심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옷과 음식과 집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세 가지 기본 요소이다.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고 어떤 집에 사느냐’는 이웃과 자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생각한다면 의식주의 방법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는 분」이다.(느9:6) 사람도 역시 하나님의 창조와 지배 안에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의식주는 ‘창조의 섭리 안에서 만물이 더불어 사는 법칙’을 준수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의식주에 대한 영성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에 대하여 숙고하기는커녕 오히려 역행해 왔다. 이는 인간중심적인 성경해석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

기독교는 이 구절을 인간중심적이며 위치적이고 물리적인 통치로 해석했다. 인간은 자연 이상의 존재이며 자연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이민족 이교도는 오직 정복해야할 대상이요 그들의 존재가치는 지옥의 불쏘시개정도였다.

이 같은 가치관은 탐욕과 폭력을 정당화했다. 영적인 가치와 전혀 무관한 좋은 집, 좋은 음식, 좋은 옷으로 대변되는 세속적 풍요를 취하기 위하여 침략이 자행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17 세기부터 19 세기까지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서구열강의 식민지쟁탈전이다. 가증스럽게도 선교라는 미명 하에 선교사를 앞세웠지만 그것은 무력으로 이루어진 이웃과 자연에 대한 약탈이요 만행이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소유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름으로 하늘을 덮고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준다.(시147:8,9) 하나님은 희년을 선포하여 자신의 소유인 땅으로 하여금 쉼을 얻도록 한다. 사람은 나그네요 우거하는 존재일 뿐이다. ‘우거’란 남의 집이나 타향에서 임시로 몸을 붙여 사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소유물에 대하여 탐욕을 부리며 제 멋대로 취하는 것은 죄악이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라.』(시24:1)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요.』(신10:14)

『토지를 영영이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위기25:23)." 2.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레25:11)

그러므로 창세기 1 장 28 절을 인간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소유권을 부정하는 지극히 불경스런 죄」이다. 이는 노동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며 일하시는 분이다. 예수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오직 먹고 놀았는가! 아니다. 하나님과 함께 그 분의 뜻 안에서 성실하게 하나님의 일에 동참했을 것이다. 타락 이전의 노동은 괴로움의 노역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성하고 즐거운 노동이었다. 본 구절은 이 거룩한 노동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다. 만약에 이 구절을 탐욕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이용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다.

창조의 질서 안에서 자연과 함께 조화롭게 더불어 사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다. 이는 기독교인이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아야만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2. 기독교와 식생활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무언가를 먹어야한다. 먹음으로써 생명을 유지하고 번식한다.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이 있다면 ‘도리’를 배우고 실천한다는 것이다. 도리란 사람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 길이니 그것은 바로 「이웃과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이치」를 뜻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제 배만 부르면 그만인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들의 이기심과 탐식은 곧 이웃과 자연에 대한 폭력이다.

‘무엇을 먹느냐’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며 그 결과도 역시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깊히 생각해보면 이는 결코 개인의 일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식생활의 결과는 자연과 이웃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자연과 이웃과 더불어 상생해야하는 창조의 섭리에 역행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는 대단히 중요한 명제이다. 개인의 건강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과 더불어 자연과 공존하기 위하여 무엇을 먹어야할 것인가?

하나님이 애초에 사람과 짐승에게 허락한 먹을거리는 채소와 열매였다. 그러나 이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29,30)

구원의 날에는 육식이 사라진다고 했다. 이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도 역시 거의 없다.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사11:7)

이로보건데 하나님이 허락한 식생활은 분명히 채식이었다. 육식이 허용되는 장면은 노아의 홍수 직후에 등장한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이 세상의 질서와 평화가 깨진 상황에서 육식이 허용된 것이다. 다만 피 째 먹는 것을 금함으로써 생명의 존엄성을 깨우치고 무분별한 육식을 금했다.(창9:2-4)

구약성경에 나타난 육식은 일상적이라기보다 대부분 제사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제사에 쓰인 희생제물이 제사장의 몫이 되거나 절기의식을 위해 잡은 제물을 먹었다. 그리고 풍요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육류가 아니라 기름진 땅과 거기에서 나는 소산물이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민8:6-10)

다니엘서의 기록은 채식에 대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신앙을 위하여 채식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건강하고 혈색이 좋았다. 또한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디 하나 상한 데가 없었다.

이 사건은 ‘육식이 채식보다 우수한 식생활이다’라는 명제 하에 해석되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채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육식을 능가하는 결과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창조직후에 먹을거리로 허락한 채소와 열매가 육류보다 본래 열등한 것이었는가?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다니엘은 믿음으로 창조직후에 허락된 식생활 즉 채식을 선택했고 당연한 결과가 나타났을 뿐이다. 이는 신앙인의 식생활 그리고 육식동물인 사자의 입을 봉하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계시하는 사건인 동시에, 채식에 대한 성경적 논리의 연속성을 의미하는 사건이다.

신약성경에서 육식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 언급되어졌을 뿐 총체적인 식문화의 차원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이방인들의 제사와 관련된 논란이나 혹은 율법적인 논란이 있었을 뿐 육식 자체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은 없다. 당시에는 소수의 부자들만 육식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개인적으로, 기독교와 식생활에 대하여 묵상하며 영감을 얻을 수 있었던 사건은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잡히던 날 밤에 행해졌던 유월절 마지막 만찬에서 육류가 아닌 떡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사로잡혔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유월절에는 어린양을 잡아서 그 고기를 쓴 나물과 함께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날에 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이 없다. 어린 양을 잡아서 그 살을 나누어 주는 것이 오히려 십자가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의미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이를 떡으로 대신했다. 기독교는 이를 의미 있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예수의 죽음으로 희생제사가 완성 종결되었다는 의미와 더불어, 희생제사와 육식과의 관계에 있어서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한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눅22:19)

초기 기독교의 교부들은 채식을 강권했다. 채식이 기독교정신에 부합된다는 것이었다. 살생의 해악과 더불어 육식이 육체의 소욕을 불러일으킨다고 보았다. 따라서 수도원생활에 있어서 채식은 영적훈련의 기본이었다. 채식은 그 후로도 교회의 끊임없는 주요관심사였고 인간의 욕망을 차단하는 신앙훈련의 방편이 되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중세에 제정된 ‘금요일에 육식을 금하는 법’을 지금까지도 부분적으로나마 시행하고 있다.

기독교가 채식과 멀어지기 시작한 시기는 로마가 정치적으로 기독교를 수용한 것과 때를 같이 한다. 로마의 번영은 식생활의 사치로 이어졌고 학자들은 이를 로마 멸망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는다. 6 세기 초에 로마가톨릭 교황 대(大)그레고리우스 1세가 7가지 죽음에 이르는 죄(deadly sin)를 규정하며 여기에 탐식을 포함시켰다. 이는 당시의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다. 채식하는 사람들을 박해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결국 로마인들의 식탐이 교회의 채식문화를 흔들어 놓고 말았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는 가톨릭교회의 금육제禁肉齋를 수용하지 않았다. 육식을 금하는 것이 ‘공덕 쌓기’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빙자한 식문화의 방종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개신교회는 신앙과 식생활의 연관성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개신교회는 수도원에 대하여 알레르기반응을 보인다. 수도원의 금욕생활에 대하여 무조건 반기를 드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육체를 학대함으로써 쾌감을 얻기 위한 방편이 되거나 ‘종교적 공덕 쌓기’로 변질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수도원의 금욕생활이 절제의 능력을 키우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까지 부인할 수는 없다.

‘절제’는 기독교인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최고의 덕목이다. 세상과의 싸움은 곧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며 절제는 이 싸움을 위한 가장 크고 강력한 무기이다. 사람을 자동차에 비한다면 절제는 자기의 안전을 위한 브레이크이다. 세속적 욕구에 제동을 걸어서 멸망으로 달려가는 것을 막는 것이 절제라는 이야기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훈련이 없이는 절제의 능력을 키울 수 없다. 끊임없는 명상과 실천이라는 수행훈련이 필요하다. 수도원은 이를 위한 훈련의 장으로서 매우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거저 받는 은사 혹은 성령의 열매’ 운운하며 절제를 위한 수행훈련을 비난하지 말라. 이는 자기의 탐욕과 게으름에 대한 적대적인 변명일 뿐이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여 자식을 편애했고 이 같은 탐식 때문에 분별력을 잃었고 심각한 가정불화를 야기했다.(창25:28, 21:1-4) 이는 육식을 탐하는 것이 영육 간에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사건이다. 따라서 식욕을 다스리는 것은 영육간의 건강을 위하여 대단히 중요하다.

식욕은 분명 다스려져야하는 탐욕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는 결코 쉽지 않다. 이에 대한 하나의 반증으로 소화제를 들 수 있겠다. 소화제는 과식으로 인한 소화기질환에 먹는 약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용액소화제의 연간 매출액이 400억 원이나 된다. 특정소화제의 매출이 이러할진대 수많은 종류의 소화제를 모두 합치면 얼마나 될까? 소화제는 음식에 대한 인간의 연약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결과물이다.

교회 역시 모이면 먹는다. 목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교인들도 모이면 먹는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3:4)를 염불처럼 되뇌며 가리지 않고 먹는다. 그것도 기왕이면 기름지게 먹어야 한다. 부자교회에서는 주일날 성가대 회식이 고급호텔 뷔페식당에 이루어진다. 과거에 어느 대형교회의 수석부목사를 지낸 어떤 이는 당시를 회상하며 ‘그 때는 하도 식사모임이 많아서 웬만한 고급음식은 눈에 차지도 않았다’고 했다. 바울의 권고가 허망하게 들린다.

“그들의 최후는 멸망뿐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뱃속을 하느님으로 삼고 자기네 수치를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하며 세상 일에만 마음을 쓰는 자들입니다.”(빌3:19)

음식에 대한 절제는 개인의 건강을 위해서 필요한 동시에 더불어 사는 법을 실천하는 데에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는 운동선수가 식욕을 다스리며 음식을 자제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운동선수는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절제하지만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웃과 자연을 위해서 기꺼이 절제한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3. 기독교와 육식

육식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된(창3:18) 저주받은 땅에서 평생 수고하며 그 소산을 먹어야 하는 인간을 위하여 베풀어진 하나님의 긍휼이다. 이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하나는 채소와 열매 외에 육식이 허용됨으로써 먹을 것을 구하는 일이 용이해 진 것이요, 다른 하나는 육식으로 인하여 인간의 수명이 짧아짐으로써 저주받은 땅에 오래 머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하나 더 보탠다면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힌 이래로 시작된 희생제사와의 관련성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예수는, 희생제사를 완성‧종결하기 위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행한 최후의 만찬에서, 어린양의 고기가 아닌 ‘떡’을 떼어주며 자기의 죽음을 기념하라 했다.

아담으로부터 노아의 홍수 이전까지는 평균 수명이 900 세를 웃돌았다. 홍수심판 이후부터 사람의 수명이 급격히 감소되어서 노아가 950 세를 산 것을 끝으로 그의 아들 샘은 600 세,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었다. 육식이 허용된 홍수 이후부터 사람의 수명이 급격히 단축되었다는 사실은 식생활에 대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후로 모세가 120 세 다윗은 70세까지 살았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수명의 한계이다.

육식과 사람의 수명을 연관시키는 것은 안식교의 주장이기도 하다. 안식교회는 ‘하나님께서는 생명이 긴 인류에게 동물성 음식을 먹도록 허락하시어 그들의 죄스러운 생애를 단축하게 하셨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자칫하면 이 글로 인하여 졸지에 안식교 옹호론자로 지목되지 않을까싶다.

안식교회가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음식에 대한 규례를 지킨다는 것을 지나치게 부정적인 시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일부는 과학적으로도 이해가 가능할 뿐 아니라, 음식을 가리고 채식을 하는 것이 건강과 장수에 크게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무조건 율법주의로 몰아붙이는 개신교회의 경직된 태도가 문제이다.

안식교회가 지나치게 율법적이라고 한다면 개신교회는 율법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기편의주의적이다. 예컨대 목사의 직을 구약시대의 제사장으로 곡해하여 교권을 강화하고 교회 재산에 대한 권리를 강화하려 한다. 초대교회가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헌금 갹출을 강화하기위한 수단으로, 십일조를 위시한 각종 헌금제도를 만들어내고, 이를 구약시대의 각종 제사과 관련지어서 강조한다. 이에 반하여 교회 밖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의 삶에 대하여는 그 내용이 어떻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교회 안은 구약적인 제도와 의식으로 견고하게 치장하고, 교회 밖의 사안들에 대하여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제멋대로 적용하며 방종과 탐욕에 대하여 눈을 감아주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도 제멋대로 행해지는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예배이다. 오늘 날 예배는 감정조작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쇼’처럼 행해지는 예배는 무례와 방종 그 자체이다. 율법을 자기편의적으로 해석 적용하는 개신교회의 이중성을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아무튼 육식은 하나님에 의해서 허용되었다. 그러나 육식에는 전제조건이 있었으니 ‘피 째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는 생명존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과학적 사실을 추가할 수 있다. 「도살되는 가축은 격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피에 노폐물이 급격하게 증가하기 때문에 피를 먹는 것이 몸에 해롭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째 먹지 말 것이니라.』(창9:1-4)

이 밖에도 성경은 여러 곳에서 생명존중의 정신에 입각하여 지켜야 할 것을 지적하고 있다.

『수소나 양이나 염소가 나거든 이레 동안 그것의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 여덟째 날 이후로는 여호와께 화제로 예물을 드리면 기쁘게 받으심이 되리라 암소나 암양을 막론하고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지 말지니라 소와 양을 그 새끼와 함께 같은 날 죽이지 말라』(레22:27,28)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출23:19下)."

식생활에 관한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은 채식이다. 기독교인의 식생활은 채식 위주로 이루어져야 한다. 혹자는 다음의 몇몇 성경 구절을 들어 방종한 식생활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당시의 특수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음식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무너뜨리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다 깨끗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먹음으로써 남을 넘어지게 하면,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해롭습니다.』(롬14:20)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딤전4:3)

당시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의 갈등이 매우 첨예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고서도 율법에 따라 까다롭게 음식을 가리며 이방인들을 꺼렸다. 하지만 음식으로 인하여 전도의 문이 막히고 교회 안에서 갈등이 빚어지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중차대한 문제였다. 바울과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해결방안을 강구했다. 그것은 형제의 신앙을 배려해서 음식을 가릴 뿐, 무엇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 그 자체에 매이지 말고 최소한의 것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내 의견은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괴롭힐 것이 아니라 다만 우상에게 바쳐서 더러워진 것을 먹지 말고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말고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먹지 말라고 편지를 띄웠으면 합니다.』(행15:19,20)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고전8:8)

교회 전체에 대한 권고는 유연했지만, 음식에 대한 바울 개인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 바울은 무엇이든지 감사함으로 먹으라고 권고하는 한편 반대 상황에 처했을 때는 스스로 먹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이는 음식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탐식으로부터의 자유와 신앙적인 식생활을 선택하는 자유를 선언한 것이다.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롬14:21)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8:13)

이싱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음식을 가리는 것은 주와 교회를 위하여 행해졌을 뿐이다. 전도를 전제로 식습관의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기 위함이었고,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육식을 하고 안 하고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상의 몇몇 구절만을 앞세우며, 「성경이 전체적인 맥락을 통해서 분명하게 시사하고 있는 채식위주의 식생활」을 거부하고, 자신의 방종하고 탐욕스러운 식생활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 중 하나인 절제는 식생활에도 적용된다. 자신의 건강을 위하여 이웃의 양식을 위하여 자연과 더불어 살기 위하여 절제의 필요성은 절대적이다. 절제는 창조의 질서 안에서 살아가야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최고의 덕목이다. 하나님은 탐욕을 몹시 싫어하신다.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백성들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 음식이었다. 그들은 애굽에서 먹던 음식을 그리워하며 하나님을 원망했다. 그들이 특별히 요구한 것은 고기였다. 탐욕 탐식은 언제나 육식을 추구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16:3)

백성들의 행태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해 놓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었지만 하나님은 백성들의 요구에 응해주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이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출16:12,13)

그러나 이스라엘은 만족하지 못했다. 애굽에서 고작 노예로 살아왔건만 그들은 그 때의 생활이 매우 풍족했던 냥 부풀려가며 하나님을 원망했다. 이스라엘이 탐욕을 부리자 하나님은 바다로부터 바람을 일으켜서 메추라기 떼를 몰아 보냈고 곧 이어 저들의 탐욕을 심판했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민11:4)

『바람이 여호와에게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영 곁 이쪽 저쪽 곧 진영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백성이 일어나 그 날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진영 사면에 펴 두었더라.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민11:32-34)

4. 육식의 폐해

구약시대의 희생제사는 죄의 결과가 죽음이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는 의미가 있었다. 그 옛날,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매일같이 수많은 가축들이 피를 흘리며 제물로 바쳐졌다. 가축의 주검으로 인하여 피비린내가 진동했을 성막과 성전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끔찍한가. 그렇다면 오직 고기를 먹겠다는 목적으로 동물을 도살하는 것에게 대하여도 생각해보라.

육식은 동물의 죽음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비록 육식이 허용되었을지라도 육식을 탐하는 것은 피조물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요 생명을 경시하는 행태이다. 인간의 타락 이후 피조물들은 평화가 깨지고 죽음이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인간을 두려워하며 고통 속에 신음하며 살아왔다. 이 피조물들이 회복의 그 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육식을 탐할 수 없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8:19-22)

『하나님의 경륜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엡1:10)

육식은 식량효율성이 매우 낮다. 학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육식은 식량효율성에 있어서 곡물의 8분의 1에 불과하다. 1 ㎏의 육류를 얻기 위하여 8 ㎏의 곡물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장정 30 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을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 한두 명이 먹어치우는 것이다. 지구의 식량난이 가중되고 곡물가가 오르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지금 지구상에는 8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영양실조와 그와 연관된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매 시간 1.500명의 아이들이 기아 때문에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이웃사랑을 외치는 기독교인이 육식을 탐하는 것은 이웃의 배고픔을 외면하는 것과 같다. 극빈국의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얼마의 기부금을 내는 것보다 육식을 줄임으로써 사람이 먹어야할 식량이 가축의 사료로 사라지는 것을 막는 일이 더욱 시급하고 중요하다.

육류의 소비가 느는 것은 자연환경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더 많은 가축을 사육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료용 곡물을 생산해야하고 이를 위해서는 대규모 옥수수농장을 만들어야한다. 그러려면 밀림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 이는 지구의 허파를 훼손하는 것이다. 대규모의 가축사육으로 인하여 탄소 배출이 급격하게 느는데 반하여 대기를 정화할 숲이 사라지는 것이다. 육류소비를 줄이는 것이 4륜구동차를 없애는 것보다 지구온난화에 더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나친 육식으로 자연환경을 망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통치에 반하는 것이다.

밀림을 갈아엎어서 옥수수농장을 만드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근래에는 더욱 획기적인 방법으로 식량중산을 이루어냈는데 「유전자 변이(조작) 농산물」(GMO :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이 바로 그것이다. ‘GMO’는 인간이 만들어낸 탐욕의 산물이다. 이는 창조의 질서를 훼방하는 것이다.

5. 육식과 건강

육식을 탐하는 것은 건강에 치명적인 해가 된다. 동물성 단백질이나 지방을 많이 섭취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는 의사는 한 명도 없다. 성인병 환자나 암환자에게 육식을 금하고 채식을 권장하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처방이다. 육식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소화분해가 어려워서 많은 영양소와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소화분해 과정에서 나오는 독성물질과 인체의 산성화가 각종 질병을 유발한다.

근래에 들어서는 완전식품으로 믿어왔던 우유가 오히려 건강에 이롭지 못하다는 건해가 속속 나오고 있다. 최고의 칼슘 공급원이라고 여겼던 우유가 골다공증의 원인으로 지목받고 있다. 우유는 어차피 동물성 식품이기 때문에 우유의 단백질이나 지방이 성인병의 원인이 될 수 있으며, 몸을 산성화시키는 동물성 단백질이 골다공증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영양학적으로 볼 때 오히려 콩으로 만든 두유가 단백질이나 지방 공급원으로서 월등히 우수하다. 칼슘은 콩이나 방울양배추, 미역 등을 통해서 섭취하는 것이 좋다.

당신은 식품에 관한 정보를 어디에서 얻는가? 유감스럽게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광고를 통해서 정보를 얻는다. 광고란 기업이 매출 증가를 목적으로 자사 상품을 홍보하는 것이다. 따라서 광고는 철저히 기업의 이익을 대변한다. 낙농기업은 우유의 유해성을 감추고 축산기업은 육식의 폐해를 은폐한다. 심지어 ‘황제다이어트’라는 가당치도 않은 다이어트방법을 뻔뻔스럽게 홍보한다. 이런 일에 있어서 기업은 종종 학자들을 매수하여 앞세운다.

근래에는 ‘탄수화물 중독증’ 때문에 밥 먹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야채를 곁들여서 다양한 곡물 위주의 식사를 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괜한 걱정을 하도록 조장하는 것이다. 탄수화물중독증이란 백미나 밀가루 음식 혹은 당분이 많은 음료나 케이크․쿠키 등을 습관적으로 과하게 섭취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서 주워들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이를 거론하며 밥 먹기를 주저한다. 하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밥을 적게 먹는 대신 육류로 배를 채우고 동물성 단백질과 지방을 괴도하게 섭취하고 있으며 때때로 크림이 듬뿍 들어간 커피와 당분이 잔뜩 함유된 음료와 케이크․쿠키를 먹으며 심지어 치킨이나 피자를 간식으로 혹은 술안주로 먹는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탄수화물중독에 영양과잉, 영양불균형이라는 질병을 더 추가해야 한다.

육체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육체에 생명이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육체는 앞서 전제한 대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노동’을 위한 거룩한 도구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건강하게 유지할 책임이 있다. 방종한 생활과 잘못된 식습관으로 육체를 망친다면 이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음주나 흡연이 건강에 해롭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인데 이를 끊지 못하고 계속함으로써 육체를 망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육체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재물을 맡은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것을 허비하는 죄’를 함께 짓는 것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육류를 멀리해야 하는 매우 중대한 현실적인 이유가 또 있다. 우리가 시장에서 만나는 육류의 대부분이 농장이 아닌 공장에서 생산된 것이라는 점이다. 소가 초지에서 풀을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비좁은 공장형축사에 갇혀서 항생제와 살충제 그리고 성장호르몬이 듬뿍 첨가된 인공사료로 사육된다. 우유를 생산하는 젖소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이러한 약품들은 육류, 유제품 등을 통해서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간다. 인체로 들어간 약물들은 면역력 파괴, 기형아 출산 등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데 이에 대한 의시시한 연구결과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

심지어는 자연의 순리에 역행하여, 초식동물에게 소를 비롯한 가축폐기물로 만든 동물성 사료를 먹임으로써 광우병이라는 대재앙을 초래했다. 그러나 광우병은 동물성사료를 전면금지하거나 광우병특정위험물질(SRM : Specified Risk Material )을 제거하여 만든 사료를 사용하면서부터 발병률이 매우 낮아졌다. 현실적으로는 광우병보다 「병원성 대장균 O-157」에 감염된 쇠고기가 더 위험스럽고, 육류를 과다 섭취함으로써 비만, 당뇨, 고혈압 등의 성인병이나 대장암 혹은 유방암 등에 걸려 죽을 확률이 더 높다.

돼지나 닭도 예외가 아니다. 현대적이고 최고의 생산성을 자랑하는(?) 육류생산공장에서는 가축의 건강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 눈으로 식별되어 상품가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질병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게를 늘려서 가격을 더 받는 것에만 골몰한다. 우리가 접하는 육류의 대부분이 건강하지 못한 가축의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달걀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의 양계장은 모두 공장형이다. 층층이 쌓아놓은 비좁은 공간에 갇혀서 사육되는 닭은, 인공사료를 먹어가며 하루에 두 번씩 낮과 밤을 겪으며 수탉도 없이 두 번씩 무정란을 생산한다. 이 같은 공장형 양계기술 덕분에 어렸을 적에 뒤주 속에 감추어 놓고 먹던 귀한 달걀이 지금은 가장 저렴한 식품 중 하나로 전락했다.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고 미각은 매우 간사하여 입을 즐겁게 해주는 먹을거리를 탐하는 데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물질적 풍요는 육류 소비의 급격한 증가를 가져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육류를 대신할만한 물질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다만 저비용으로 대량생산을 가능케 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른바 기업형 육류생산공장을 만들어낸 것이다. 덕분에 엥겔계수는 낮아졌지만 동시에 먹을거리의 질도 형편없이 낮아졌다.

기업형 육류생산공장의 등장으로 사람들은 저비용으로 육식을 즐기게 되었지만 이는 결코 축복이 아니다. 이는 개인의 건강을 해치고 동물을 학대하고 자연을 망치고 창조의 질서를 훼방할 뿐이다. 지난겨울 우리나라를 휩쓸고 간 구제역은 이에 대한 분명한 증거다.

6. 육류소비증가와 우리나라의 축산업 그리고 구제역

우리나라의 직장인들의 부동의 회식 선호 메뉴 1위가 삼겹살에 소주라고 한다. 실제로 거리에 나가보면 육류를 판매하는 음식점들이 늘비하고 그 중에서도 삼겹살에 소주를 파는 곳이 으뜸이다. 다음의 기사가 이를 숫자로 전하고 있다.

『회식, 외식 때 삼겹살을 부르짖는 대한민국. 지난해 우리나라 국민은 1인당 돼지고기를 19.6㎏을 먹었다. 이중 삼겹살 소비량은 절반가량인 9㎏에 달한다. 1년 동안 한 사람이 무려 45인분(1인분=200g)이나 먹은 것이다(농촌진흥청). 돼지고기 부위별 구매 비중(농촌경제연구원)을 살펴봐도 한국인의 유별난 삼겹살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돼지고기 부위 중 삼겹살 구매 비중(2009년6월 기준)은 30.8%를 차지했다. 다리는 21.1%를, 등·안심은 6.7%에 불과했다.』[데이터뉴스 2009. 12. 7]

쇠고기의 소비량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2일 농림수산식품부에 따르면 작년 한 해 국내 쇠고기 총소비량은 43만4천t(정육기준)으로 국민 1인당 소비량이 8.9㎏으로 파악됐다. 이는 지난 2006년의 1인당 소비량 6.8.㎏보다 30.9% 증가한 것이다. 1인당 쇠고기 소비량은 2007년 7.6㎏, 2008년 7.5㎏, 2009년 8.1㎏ 등이었다. 총소비량 43만4천t 가운데 국내생산이 18만9천t, 수입이 24만5천t으로 쇠고기 자급률은 43.5%로 2004년(44.2%) 이후 가장 낮았다. 쇠고기 자급률은 2005년 48.1%, 2006년 47.8%, 2007년 46.4%, 2008년 47.6%, 2009년 50.0% 등이었다.』[연합뉴스 2011. 3. 2]

우리나라는 1980 년대부터 소득의 증가와 함께 육류의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점차로 부업축산에서 전업축산으로 변모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기후환경은 축산업에 적합하지 않다. 제주도를 제외하고는 목초지나 방목지가 빈약하고 기후조건도 매우 불리하다.

국토의 67%인 680만㏊가 산지로 되어있으나 초지면적은 0.4%인 4만여㏊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료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식량자급율은 겨우 26%이다. 쌀을 제외한 식량자급율 5%에 불과하다. 모자라는 곡물은 수입에 의존하는데 연간 수입량이 1,400만 톤이다. 이 중에서 사료용이 무려 60~70%에 이른다. [참고: 농민신문 2011. 1. 12]

이처럼 열악한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축산업의 부가가치는 재배업의 반에도 훨씬 못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경제적 효율성으로 따져볼 때 - 겨우 연간 20억 원어치의 쇠고기를 수출하겠다는 일념으로(?) - 구제역 청정국가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340만 마리의 가축을 살 처분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이 같은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축산업은 좁은 공간에 많은 수의 가축을 사육하는 밀집형태가 될 수밖에 없다. 이를 일컬어 소위 ‘공장형축산업’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사육환경이 열악해지고 질병예방을 위한 과량의 항생제투여가 필수적이다. 여기에 생산성 향상을 위한 성장호르몬제가 더해지면서 가축은 면역력을 거의 상실하게 된다. 이 같은 현실에서 구제역이 전국적으로 창궐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정부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대형 축산농가를 대상으로 사육 마릿수를 제한하는 '쿼터제'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축산업 허가제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니 말이다.

구제역은 우제류 가축이 감염되는 바이러스성 급성전염병으로서 전염성이 매우 강하며 치사율이 5~55%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제역으로 말미암아 살 처분 된 소 돼지의 수가 불과 3 개월 만에 전국적으로 340만 마리를 넘어섰다니 14세기에 발생하여 2000천만 명의 희생자를 냈던 페스트를 연상케 한다.

1997년 대만은 구제역으로 무려 385만 마리의 가축을 살 처분했고, 2001년 영국은 600만 마리의 가축을 살 처분했다는데 기어이 우리나라도 300만 마리 이상의 가축을 살 처분한 나라로 등극한 것이다.

예전에 없던 이 같은 일이 일어나는 이유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축산업의 성장으로 인하여 가축의 개체수가 많아졌기 때문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매장된 가축의 수 342만여 마리. 이는 국내에서 사육하는 소 돼지의 25%가량이다. 현재 이들의 무덤은 전국 4400개에 달한다.』[머니투데이 2011. 3. 11]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이 숫자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 작년 11월29일 구제역 발생이 공식 확인된 뒤 21일까지 살처분된 가축은 모두 347만9천513마리(소 15만871마리, 돼지 331만7천864마리)로 늘어났다.(연합뉴스 2001. 2. 22)

구제역은 가축 외에 사슴이나 코끼리 등의 우제류 동물들도 감염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야생동물이 구제역에 감염된 사실이 보고된 적이 없다고 한다. 야생동물은 밀집 사육되는 가축에 비하여 월등한 면역력과 자연치유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7. 맺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기독교인이 채식을 해야 하는 성경적인 근거는 충분하다. 역사적으로도 기독교의 채식은, 초기기독교에서부터 중세를 거쳐 근세에 이르기까지 점점 약화되기는 했지만 수행의 한 방편으로 꾸준히 이어져 왔다.

그러나 개신교회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거의 관심조차 없는 것 같다. 수십 년 동안 개신교회 안에서 사역을 해왔지만 접해본 적도 없고 개인적으로 생각해본 적도 없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근래에 ‘창조 질서의 회복’을 목표로 전개되고 있는 ‘환경신학’이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환경신학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낯설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열린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해왔건만 역시 낯설다. ‘신과 인간’의 관계회복이라는 인간중심적 구원관에 얽매인 사람들을 비판하며 인간과 인간의 관계회복을 외쳐왔지만 환경문제에 대하여는 이제껏 단편적인 사고에 머물고 있었다. ‘환경과 생명’은 기독교에 있어서 결코 윤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창조 질서의 회복’이라는 영성의 문제이다. 이것이 환경신학의 화두이다.

「여전히 우리 의식 속에서는 성속 이원론(聖俗 二元論)이 지배하고 있다. 이 구원관이 수정되지 않는 한 환경문제는 여전히 특수사목의 한 분야로 혹은 구원의 들러리로 보게 될 것이다. 인간 중심주의 구원관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제는 슈바이처의 생명 경외 사상이 필요한 때이다. 각 교구나 본당, 주일 학교, 수도원과 수녀원, 신심 단체에서 창조론적 영성에 입각하여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 인간과 물건과의 관계, 우주 속의 인간의 위치에 대하여 다급하게 말해주어야 하는데 대신(對神), 대인(對人)관계에만 치중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관계를 정립하지 않는 한 무슨 제도적 장치, 기술적 처방, 운동적 전략, 과학적 대안이 나올 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물질 즉 땅, 나무, 숲, 공기, 물을 생명으로 보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물질을 박해할 것이다.」( 1995. 7 ‘환경과 신학의 문제’ 정홍규)

채식은 식생활이 본래의 모습을 찾는 것이요, 환경신학에 앞서는 기독교인의 삶이요, ‘창조 질서의 회복’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다. 또한 이는 개인의 건강이나 지구환경 문제에 있어서 과학적으로도 입증된 사실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를 외면하는 것은 죄악이다.

기독교인의 식생활은 채식 위주로 행해져야 한다. 다만 전도를 위하여 또는 어린 신자를 위하여 양보할 수 있으며, 또한 채식을 자랑함으로써 육식을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자연스럽게 육식을 지양하고 채식으로 바꾸어가야 한다. 유연하면서도 고집스럽게 채식을 추구해야 한다. 채식주의자가 아닌 채식인으로서 식생활의 본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도 더불어 사귀지 말라.』(잠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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