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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살생의 정신으로 육식을 줄이고 채식하기/해강스님
한채연 2012-02-18 10:33:05

불살생의 정신으로 육식을 줄이고 채식하기

/법문 : 해강스님

1. 서원이란 무엇인가

서원은 참회와 함께 불교의 신앙과 수행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틀입니다. 서원은 우리 삶의 결을 아름답게 다듬어 가는 방법이고 길입니다. 삶이란 몸 쓰고 마음 쓰고 말 쓰는 즉,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강조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결을 다듬는다는 것은 곧 삼업을 닦는 것입니다.

삼업을 닦아가는 수행이란, 악법을 선법으로 돌리는 행동입니다. 삼업을 닦는 수행으로서 악을 그치고 선을 짓는 가장 기본으로 제시되는 방법이 불자들의 계율입니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열 가지 악법을 10가지 선법으로 바꾸는 것이 가장 기본이 되는 구성입니다.

열가지 내용 중 살생, 투도, 사음은 몸으로 짓는 악업입니다. 즉, 신업(身業)에 해당되고 망어, 기어, 악구, 양설은 입으로 짓는 악업, 즉 구업(口業)이요, 탐진치는 마음으로 짓는 악업, 즉 의업(意業)에 해당됩니다.


2. 불살생의 바른 뜻

그 가운데 가장 우선이 되는 계(戒), 인류 공통의 가장 최고 제일의 덕목으로 내세우는 것이 불살생(不殺生)입니다. 불교 뿐 아니라 인도에서 발생한 다수의 종교와 사상들이 가장 중요하게 내세우는 덕목이 곧 불살생이죠.

대표적으로 자이나교 출가자들은 평생 불살생을 지켜가기 위해서 매우 엄격한 계율이 요구됩니다. 간략하게나마 내용을 들여다보면 자이나교 출가자들은 평생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생활합니다. 혹시 나체의 수행자들을 TV같은 매체를 통해서라도 접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불교 경전에 보면 나형외도(裸形外道), 홀딱 벗은 수행자들이라 하여 자이나교를 언급해 놓았습니다. 이렇듯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맨 몸으로 생활 하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가 불살생의 실천입니다.

그들은 길을 가다 물웅덩이가 있으면 그것을 밟지 않고 옆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갈 수 없으면 오던 길을 되돌아가면 되돌아갔지 물웅덩이를 밟고 지나가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물에 가려져 보이지 않아서 밟아 죽일 수도 있는 생명의 살생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물을 마실 때에도 반드시 걸러 마십니다. 요즘의 자이나교 수행자들은 수돗물을 마시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수돗물이라는 것이 소독을 해서 병균을 죽여버린 것이잖습니까. ‘살생한 물’이라고 해서 수돗물조차도 마시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자이나교 평신자들 집의 수도꼭지에는 물거름망이 반드시 달려있습니다. 평신도 역시 불살생의 계율을 매우 굳게 지킵니다. 충격적인 것은 자이나교의 출가수행자들은 머리입니다. 그들은 머리를 깎지 않습니다. 기르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칼을 이용해 머리를 깎을 때 일어날 수도 있는 살생을 피하기 위해서 수염과 머리를 2-3개월에 한 번씩 손으로 뽑아냅니다. 얼마나 아프겠어요. 자이나교 수행자들은 또한 호흡할 때 코나 입으로 들어올 수 있는 병균들을 막기 위해서 가림막(마스크)를 쓰고서 수행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조차도 그들이 불살생을 위한 아주 엄격한 계율 가운데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불살생 계율을 지키는 게 그들에게는 엄청난 고행이지만 철저하게 계율을 지킵니다.

우리나라의 옛날 스님들도 일상생활에서 불살생을 하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하셨습니다. 옛날 스님들이 신으시던 짚신은 일반인들의 그것과 달랐습니다. 밑바닥이 더 두껍고 올이 굵고 더 헐겁습니다. 길을 가다 밟아 죽일 수 있는 미물들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이지요. 그 정도로 세심한 배려를 했다는 것입니다. 멀리 여행을 갈 때도 물거름망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개울물이나 우물물을 마실 때 그 속의 작은 생명이라도 마시지 않기 위해 반드시 걸러서 마셨습니다.

TV사극물에서 스님들이 지팡이 짚고 가는 거 보셨지요? 왜 짚으실까요?
그 지팡이를 육환장이라 하는데 여섯 개의 쇠고리가 달려있습니다. 지팡이로 땅을 쿵쿵 치면 땅이 울리고 동시에 육환장의 쇠고리가 울릴 것 아닙니까. 이 소리를 짐승들이 듣고 미리 피해가라는 경종입니다. 이렇듯 일상생활에서도 불살생을 위해 세심한 배려를 해왔던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 불살생이라는 계율은 인간에게 주어진 인간의 계율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사람을 해치지 않음, 더 나아가 비중 있는 생명 존재인 동물에 대한 불살생입니다. 더 나아가면 이 세상 모든 생명 존재들의 평화를 지켜내는 것이 불살생의 정신입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에 와선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체이든 무생물이든 간에 그 존재들의 고귀함과 존귀함을 알고 그것을 지켜주는 것이 곧 불살생의 정신입니다.

불살생(不殺生)이라고 한자로 이야기하니까 단지 ‘산목숨을 죽이지 아니하는 것’이라고만 알기 쉽습니다. 그러나 불살생의 원어는 범어(산스크리트어)로 ‘아힘사(Ahimsa)’인데, ‘아힘사’라는 인도말이 가지고 있는 원뜻은 생명을 죽이거나 해를 끼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억압하는 등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생명 존재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 아닌 모든 존재에게 비폭력으로 대하는 것, 이것이 ‘아힘사’이며 불살생의 본뜻입니다. 물리적으로, 신체로, 언어로, 심지어 마음으로 행하는 모든 형태의 폭력을 행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3. 불살생 정신의 토대

불살생을 행하는 것은 단순히 생명존재가 고귀하기 때문이거나 불쌍해서가 아닙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살생 계율은 연기적 세계관의 바탕에서 내세운 실천 수행사상 입니다. 구체적 실행 방법이라는 것이지요.

모든 생명 존재가 고귀한 이유는 연기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나 아닌 모든 존재는 나를 성립시키는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나 아닌 모든 생명 존재는 나를 낳고 나를 유지시키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 존재들이 고귀하고 소중하니 잘 지켜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살생이 단순히 생활지침의 계율이 아니고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연기적 세계관에 입각한 가치관의 실천이고 실질적인 실천방법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와 존재들은 서로 의지해서 성립하는 것이고 서로가 서로를 낳는 원인이며 유지시키는 관계로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각각 생명들은 모두 소중하고 존귀한 것이지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자마자 선언하시기를,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 하셨습니다.


4. 불살생의 삶을 구현하는 구체적 방법 한 가지를 제안합니다.
- 육식을 줄이거나 끊는 것, 채식습관 -

이렇듯 중요한 의미가 있는 불살생은 불자의 최고덕목입니다. 이 불살생을 우리의 삶에서 실현해내기 위해서는 특정한 형식 한 가지를 선택하여 실천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이를 위한 방법의 하나로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육식에 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육식은 생명존중의 연기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식습관이 아니며, 비불교적 행동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반하는 행위입니다. 이 세상을 연기적 세계관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모든 존재가 존귀하고 소중하며 나를 낳는 어머니요 유지시키며 양육시키는 존재인데 어떻게 그것을 먹을 수가 있겠어요.

제 말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반론할 수 있습니다. 초기 불교에서 부처님은 육식을 금하지 않으셨다고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초기 불교에선 부처님께서 무조건 육식을 금하시는 계율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확히 그 속내를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 당시 부처님과 출가 수행자들은 탁발걸식으로 먹는 것을 해결했습니다. ‘스님’은 범어로 ‘비구’라고 합니다. ‘밥을 빌어먹는 수행자’란 뜻입니다. ‘거지’와 같은 말입니다.

부처님께선 육식을 금지하지 않으셨지만 권장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탁발걸식이라는 당시의 문화형태에서 찾아야 합니다. 밥을 빌어먹는 거지가 “나는 채식주의자니 고기는 빼고 주세요”라든가 “나는 스님이니까 고기는 깔아주세요”(웃음) 이렇게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안 통하지요, 그건.

얻어먹는 자에게는 어느 아이스크림 가게처럼 31가지로 골라먹는 재미가 없잖아요. 얻어먹는 음식은 재가의 시주자가 자기가 먹기 위해서 준비한 음식이고 먹다 남은 음식입니다. 어느 때는 푸성귀만 있을 수도 있고 어떤 경우 고기도 들어있을 수 있겠지요. 당시에 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그렇게 해서 부득이하게 얻어먹게 된 것입니다. 요즘처럼 고기를 먹으려고 고기를 찾고 고기를 즐겨서 먹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얻어먹는 고기에 대해서는 ‘먹어라’느니 ‘먹지 마라’ 언급하실 필요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얻어먹는 고기라고 하여 그것을 다 먹을 수 있었느냐, 그건 아닙니다. 초기계율에는 고기를 금하신 몇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먼저 나를 위해 준비한 고기는 먹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잡은 것을 보았거나 잡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 고기로 음식을 만들어 줄 경우 그것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비록 얻은 고기라도 먹어서는 안 되는 육식을 금지하는 몇 가지 계율이 있습니다.

대승불교에 와서는 육식을 대승계율로써 아주 금지하게 됩니다. 금지하는 계율이 생긴 문화 ․ 역사적 배경을 이 자리에서 모두 말하기엔 너무 방대하여 무리일 거 같고, 다만 옛 대승 불교의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육식을 하지 말라고 하며 내세운 몇 가지 이유 가운데 대표적인 것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육식을 하면 자비종자가 끊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앞서 육식은 생명존중의 연기적 세계관에 바탕한 행동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진정한 자비는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동체대비의 연기적 세계관을 토대로 생겨납니다. ‘동정심에, 불쌍해서…’ 이것은 진정한 자비가 아닙니다. 모든 생명을 동체대비의 연기적 세계관으로 본다면, 그 생명들을 즐겁게 죽여서 맛있게 먹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겠지요?

사랑의 관계로서 너와 내가 비로소 성립되어 있는데 내가 나 아닌 너를 죽여서 맛있게 먹는 사람에게 어떻게 자비심이 있으며 어떻게 그 관계가 유지되겠습니까. 그래서 옛 스승들은 “보살이, 출가 수행자가, 불제자가 중생의 살을 씹으면서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겠다고 얘기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또 육식을 하면 피가 탁해지고 정신이 흐려진다고 믿었습니다. 성품이 거칠어지고 포악해 진다고도 믿었습니다. 무엇을 먹느냐가 그 사람의 성품을 결정하는데 상당히 과학적 근거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육도윤회설(六道輪廻設)을 들어 얘기해보자면, 생명 존재가 육도를 윤회한다면 축생으로도 윤회할진대 전생 또는 내생의 나의 부모 형제였거나 나의 부모 형제일 수 있는 사랑하는 나의 생명 존재들을 잡아먹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대승의 스승들은 육식을 금했습니다.

그러한 이유 외에도 오늘날에는 과도한 육식문화에서 비롯되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요즘 병이 많아진 이유를 어떤 이들은 “옛날에는 무슨 병인지 몰라 죽어버려 넘어갔지만 지금은 의학이 발달되어 시시콜콜 캐내니까 병이 더 많아진 것일 뿐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어디 정말 그 뿐인가요? 한 예로 옛날엔 못 먹어서 생긴 병이 많지만 오늘날은 너무 잘 먹어서 생기는 병들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고기를 너무 자주 많이 먹어서 생기는 병들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먹는 고기들이 정말로 건강한 것들이냐는 것이지요.
중국인들은 돼지고기를 즐겨 먹는데 중국 남부의 한 지역에는 돼지를 잡는 독특한 방식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짐승이 도살당할 때 한과 독기를 품는다고 믿습니다. 그 한과 독기가 피에 스며들고 고기에 스며들기 때문에 그 고기를 먹으면 건강을 해친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돼지를 잡을 때 꽁꽁 묶은 후, 돼지의 귀를 회초리로 계속 때립니다. 귀를 때리면 화와 독기가 귀 쪽으로 계속 몰리는데, 그것이 극한에 달했다고 판단될 때 대나무 꼬챙이로 귀 뒤의 급소를 꾹 찔러 피를 모두 빼냅니다. 그렇게 그 피를 모두 빼내고 난 후 그 고기를 먹는다고 합니다.

식물도 인지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과학자들도 있는데 하물며 동물은 어떻겠습니까. 소나 돼지를 어릴 때 키워보신 분들은 아실 거예요. 소나 돼지는 죽을 때 그것을 압니다. 소가 도살장에 갈 때는 가지 않으려고 자욱자욱 일부러 걸음을 늦게 가며 눈물도 흘린다고 하지요. 자신이 억울하게 죽는다는 걸 아는 생명 존재가 품는 마음이 어떨까요.

또한 육식문화는 생명 경시 풍조도 만듭니다.
여러분들이 먹는 고기를 제공하는 가축이 어떻게 사육되고 어떻게 도살 되는지 그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본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시는 고기를 못 먹을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비인간적이고 너무도 폭력적이고 억압적으로 가축들이 사육되고 도살되는 것을 보고 난 후로 채식주의자로 돌아섭니다.

그 외에도 육식문화가 널리 퍼짐으로 인해서 생겨난 많은 문제가 지구촌 전역에 널려 있지요. 환경문제, 식량문제, 그로 비롯된 기아 등등 …
사실 지구상에서 생산되는 곡물은 지구상의 모든 인구가 먹고도 남을 만큼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치 경제의 논리, 그리고 육식 문화 등등에 의해 곡물이 골고루 분배가 되지 않음으로 해서 식량부족과 기아현상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우리 절에서도 기회가 되면 과도한 육식문화가 나 자신과 우리와 지구촌 환경 등에 어떤 문제를 발생시키는지, 우리가 먹는 가축들이 어떻게 사육되고 폭력적이고 잔인하게 도살되는지에 관한 현장을 담은 영상을 함께 보고 육식에 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불자는 마땅히 육식에 대한 보다 깊은 반성이 필요하고 채식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이유들로 육식을 금하고 채식으로 돌아가는 실천운동들이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문화, 즉 육식문화를 전통으로 갖고 있는 서양이 채식운동이 훨씬 더 발달 되어있고 앞서 있습니다.

사실 육식을 즐겨하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육식을 끊기는 어렵습니다. 오늘날 채식문화가 발달된 서구사회의 경우를 보면 육식을 끊고 채식으로 가는 과정을 여러 단계로 나누어놓고 있습니다.


△ ‘준채식주의자(semi vegetarian 세미 베지테리안)’라고 하여 소나 돼지 같은 포유류는 먹지 않고 닭고기나 유제품, 달걀, 해산물 같은 것들은 먹는 채식주의자가 있습니다.

△ 한 단계 더 나아가면 포유류뿐만 아니라 닭고기나 오리 같은 조류도 먹지 않고 유제품과 계란, 해산물, 생선을 먹는 채식주의자(pesco vegetarian 페스코 베지테리언)가 있습니다.

△ 다음 단계에선 유제품과 계란만을 먹는 채식주의자(lacto ovo vegetarian 락토오보베지테리언) 가 있고 유제품만을 먹거나 계란만 먹는 채식주의자가 있고요.

△ 궁극적인 채식주의는 오직 채소만을 먹는 마지막 단계의 채식주의자(vegan 비건)가 있습니다. 완전한 채식주의인 것이지요.

이들의 채식에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만 채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존중의 자비심이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이들은 음식만 채식을 하는 것이 아니고 가죽제품이나 모피 의류도 사용하거나 입지 않습니다.

우리 불자들이 이런 부분에 얼마나 둔감한가 하면, 가끔 절에 기도하러 오면서 밍크코트, 밍크목도리를 두르고 오는 불자들도 있어요. 가죽 신발이나 가방은 백 번 양보하여 이해할 수도 있는데, 밍크코트나 여우목도리는 경우가 참 다릅니다. 밍크코트나 여우목도리가 내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쳐 오게 되는지 아십니까?

동물이 죽으면 경직이 오고 경직도에 따라 가죽이나 털의 질도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장 질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 살아있는 상태에서 가죽을 벗기고 모피를 얻는다고 합니다. 불자는 이런 식으로 얻어지는 모피나 가죽을 입어서는 안 됩니다. 불자가 아닌 채식주의자도 입지 않는데 하물며 자비심을 길러야 할 불자가 입다니요.

내가 직접 죽이지 않았더라도 가죽이나 모피를 좋아하게 되면 수요를 늘리는데 기여하게 되고 수요가 늘어나면 공급을 늘리기 위해 살생이 늘어나고… 결국 ‘간접살생’을 행하는 것입니다. ‘간접 살생은 직접 죽인 것보다 죄가 덜 될 것이다?, 가벼울 것이다?’ 천만에요. 한 마디로 살생교사입니다. 어찌 보면 죽이라고 시킨 겁니다. 오히려 직접 죽인 것보다 죄가 더 무거울 수 있습니다. 정말 끔찍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린 그 끔찍한 짓들을 별 생각 없이 먹고 쓰고 입으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가슴 치는 깨달음과 반성, 참회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것을 실천하는 채식주의자가 진정 바람직한 채식주의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는 채식주의자도 있습니다.
동물 생명만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식물 생명까지도 존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줄기나 뿌리나 잎채소는 먹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줄기나 뿌리와 잎을 얻기 위해서는 그 식물을 죽이거나 해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식물을 해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열매만을 먹습니다. 과일이나 견과류 같은 열매만 먹는 채식주의자(fruitarian 프루테리언)들입니다. 그들은 벌꿀도 먹지 않습니다.

이러한 ‘생명존중자’들은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을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스스로 깨달은 ‘독각(獨覺)’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채식은 생존을 위해서 다른 생명의 희생을 최소화 하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육식을 한 순간에 끊지 못한다면, 최소한 육식을 멀리 하고자 하는 노력들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러한 노력들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무엇일까요?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의 길로서 제시한 팔정도의 첫 번째가 정견(正見)입니다. 정견은 나와 이 세상과 부처님의 교법에 대한 바른 이해, 바른 생각, 바른 견해입니다. 한마디로 연기적 세계관을 정립하는 것이 곧 정견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정견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정견에 부합하는 끊임없는 노력과 삶의 태도가 필요로 합니다. 바로 다른 모든 생명 존재를 아끼고 사랑할 줄 알고 그 고귀함을 제대로 인식하고 이해하고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채식이야말로 우리가 이 세상에 정견을 세우는, 그래서 정견을 통한 해탈을 이끌어 내는 지름길이자 유일한 길이라 하겠습니다.

육식 습관을 버리고 채식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식습관을 바꾸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대승보살의 길이고 대승보살의 수행방법이요, 대승보살의 삶입니다.
불교에서의 보살이란 나와 너,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가는 이입니다. 이것이 보살의 삶의 방식입니다. 옛 스승의 ‘보살이 중생의 살을 씹으면서 중생구제의 자비를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씀을 깊이 새겨 음미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원법회를 하면서 각자 개인을 자기 나름의 서원을 세워서 실천하지만, 우리가 함께 세우는 공동의 서원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생각해봤습니다. 그러한 공동의 서원으로 오늘 제가 제안하는 것이 ‘불살생의 정신으로 육식을 줄이고 채식주의자가 되기를 발원하고 서원하는 것’입니다.

다음 기회에 보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해 가도록 하겠고요, 오늘 제가 제안 드린 불살생의 정신으로 육식을 줄이고 채식을 넓혀가고, 궁극적으로 채식주의자가 되겠다는 발원과 서원에 공감하고 동의하고, 또 그 서원에 동참하시겠다고 마음먹는 분들은 일어나셔서 부처님 전에 절을 세 번 하는 것으로 오늘 법회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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