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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진 동물: 동물과 기독교
한채연 2013-12-06 11:02:27

 

십자가를 진 동물 (1) : 동물과 기독교  


조수영

동물권연구활동모임 프로젝트 "A" 칼럼니스트 

http://blog.daum.net/projecta2013/98


"인간, 특별히 억압받는 인간을 위한 관심과 동물을 위한 관심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 존 캅(신학자) -

"윤리란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한계 없는 책임감이다."

- 알버트 슈바이처-


 

얼마 전, 책을 읽다가 눈물을 흘렸던 일이 있습니다.

개인 사업을 운영하는 저는 자본주의 경제라는 것에 대하여 회의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내적인 갈등을 겪고는 하는데, 그 날도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제 안의 갈등이 ‘분노’라는 감정으로 폭발했던 것이었습니다.

늦은 밤까지도 생각은 정리되지 않았고 복잡한 마음으로 읽던 책을 펼쳤는데 마침 다음과 같은 글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공동체에 속한 책임 있는 구성원이라면 그 공동체에서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의의 강력한 의미이다.......우리가 서로 운명을 공유하는 것이 관건이다.” (생명의 해방/찰스 버치, 존 캅)

이 문단은 저의 머리를 때리고 심장을 적셨습니다.

그날 밤, 더는 책장을 넘기지 못했지만 이 한 문단에는 저의 내적인 갈등을 해결하기 충분할 만큼의 힘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개인의 경제활동에만 국한된 깨달음은 아니었습니다.


저의 갈등은 개인적인 경제 활동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윗글은 사회와 국가, 세계라는 공동체가 지향해야 하는 방향, 그리고 그 안에 속한 구성원으로서 나라는 개인이 지향해야 할 인생의 모습을 포괄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공동체라는 반경이 과연 인간에게 한정되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공동체에 대하여 여러 가지 깊이 있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공동체의 구체적인 반경에 대해서는 종래의 인간중심적인 시각에서 더는 나아가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특히, 동물에 관련된 문제에 관하여 기독교는 동물을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로서 인간과 확연히 구분하는 이분법적 시각을 유지하며 동물을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창조한 수단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이 동물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기독교 철학의 성립에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이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중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사다리’라는 개념으로 생명체를 계층화시켰습니다. 인간이 사다리의 제일 위에 있고 동물과 식물은 그 지성(이성)의 크기에 따라 그 아래 단계에 차례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계층이 낮은 생명체는 그보다 높은 단계의 생명체의 먹이가 되거나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설명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 같은 논지로 노예의 존재도 인정했습니다. 그리스인이 높은 이성적 능력을 가졌으며 노예들은 타고나기를 이성적 능력이 부족함으로 그리스인들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동물은 인간 노예보다도 더 낮은 이성적 능력을 지닌 열등하고 불완전한 존재로서, 좀 더 완전하고 우월한 인간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도록 태어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주장은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신플라톤주의 학파 등을 통해 동물에게 단순히 이성이 없을 뿐 아니라 관념을 파악하는 능력, 심지어 경험을 통한 학습 능력조차 없다는 주장으로까지 확대 계승되었고 바로 이러한 개념이 4세기 초반에 초기 기독교 전통에 흡수되기에 이릅니다. (동물, 인간의 동반자/제임스 서펠 참조)

그런데 고대 그리스 철학에 이러한 관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피타고라스학파와 플라톤 학파는 동물이 이성적인 영혼을 지녔다고 주장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테오프라스토스도 동물이 인간과 같은 종류의 존재라는 이유로 육식을 반대했습니다. 디오게네스는 동물이 여러 측면에서 인간보다 우수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고요.


그러나 정말 유감스럽게도 초기 기독교는 이러한 여러 견해 가운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취함으로서 그 이후 야기될 셀 수 없이 많은 비극적 동물학대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출발선에 서게 됩니다. 또한 기독교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서양 윤리의 주요 전통이 인간이 동물을 다루는 일을 심각하게 고려하는 데 실패하게 된 원인이 됩니다.


성공회 신부이자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인 앤드류 린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특히 스콜래스틱-카톨리즘(스콜라 철학과 결합된 가톨릭 교리)에서 나타나는, 동물의 권리를 부정하는 기독교 전통은 현시대의 동물학대에 책임이 있다.”(Animals&Christianity, Andrew Linzey/Tom Regan)

초기 기독교의 견해를 정리하고 확립한 것은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스콜라 철학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그는 동물의 이성 뿐 아니라 영원성까지 부정했고, 인간은 동물에게 어떤 의무도 지고 있지 않으며 그 이유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동물에 대한 전적인 지배권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인간이 동물을 대함에 있어서 도덕적 배려를 전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희박하게나마 나와 있는, 동물에 대한 자비를 주장한 것으로 보이는 구절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철저하게 인간중심적 시각으로 해석했습니다.

“성서에는 짐승을 잔인하게 취급하는 것을 금하는 대목이 더러 있는데.....이것은 짐승을 잔인하게 대하는 습성이 사람에게까지 옮겨가지 않도록 함으로써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잔인하게 대하려는 성정을 없애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동물에게 입힌 손상이 사람에게 현실적인 손실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물, 인간의 동반자/ 제임스 서펠)

즉, 인간이 동물을 잔인하게 취급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잔인하게 대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 동물의 주인이 되는 사람의 경제적 손실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어디에도 동물이 겪는 고통에 대한 연민이나 윤리적 우려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아퀴나스의 교리는 13세기부터 동물에 대한 서방 기독교의 입장을 지배하게 되었고 근대를 거쳐 현대의 기독교에도 변함없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세속 철학은 동물에 대한 인식을 미약하게나마 전환하기 시작했고 20세기 후반에는 일부 철학자들이 적극적으로 동물이라는 존재를 인간이 이용하는 수단에서 스스로의 권리를 가진 존재로 인식하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기독교 내부에서는 여전히 동물에 대한 논의 자체가 희박하며, 인간과 동물 사이의 유사성이나 동물에 대한 인간의 도덕적 의무를 부정하는 모습이 뿌리 깊게 남아있습니다.

기독교는 동물에 대한 인간 지배의 정당성의 근거를 창세기 1:27~28에서 찾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개역개정판 성경전서 제4판)

모든 생물 가운데서 인간만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므로 다른 생물과는 다른 차별되고 월등한 존재이며, 그런 인간에게 동물을 다스리는 지배권을 주셨으므로 인간은 동물을 인간의 뜻대로 다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결과적으로 인간이 모든 동물을 착취하거나 학대하는 것에 대한 큰 윤리적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고 나아가서는 인간과 자연계와의 분리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해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위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본래 하느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라는 생명 공간을 만드셨고 각각의 생명 공간에 한 부류의 생명체들이 살도록 하셨다. 하늘에는 새를, 바다에는 물고기를 살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땅에는 서로 다른 두 부류의 생명체, 즉 동물과 사람이 함께 살도록 하셨다. 동일 공간 내에 두 생명체가 사는 것은 갈등과 혼란을 야기한다. 이에 하느님은 먹이를 얻는 방식을 각기 달리 하도록 하였다. 짐승은 저절로 나는 풀을 먹을 것이며 인간은 씨를 뿌려 경작하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땅을 지배하라는 것은 본래 경작하는 행위를 뜻한다고 생태신학자들은 추론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서가 동물들의 생존 자체를 처음부터 염려하였다는 사실이다. ‘땅’ 이라는 동일 공간에서 살되 먹이를 달리하면 싸움 없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창조 시 동물은 결코 인간의 도구나 수단으로 존재하지 않았고 인간은 경작을 통해 동물의 고유한 삶 자체를 지켜주는 삶을 살도록 운명 지어진 것이다.” (동물권에 대한 신학적 소견, 새길이야기 2009년 겨울호 /이정배,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동물은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며 더구나 인간의 ‘먹이’로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윗 성경구절의 바로 뒤를 있는 창세기 1장 29절은 하느님이 태초에 인간에게 허락하신 먹거리가 동물이 아닌 ‘채소와 과일’(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임을 분명히 천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28절은 강조되면서 29절은 상대적으로 덜 조명 받는다는 사실은 기독교가 동물에 관하여 한쪽으로 치우친 채 편협하게 굳어져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육식을 허락하였다고 하나 이는 인간의 한계로 인한 하나님의 매우 한정적인 양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신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즉, 육식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한계 내에서 ‘허용’한 것입니다(종차별과 기독교, 2013 동물보호시민교육 자료/이 원표, 영생고등학교 교목). 인간이 동물을 먹게 된 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비롯된 것이지 하나님의 원래 의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홍수 이후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더불어 하느님은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다. 처음 창조 때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 것이니 다음의 약속은 꼭 지키라고 한 것이다. 사람들 눈에서 억울한 눈물을 흘리게 하지 말 것과 동물을 피 째로 먹지 말라는 것(창세기 9장 1~7절)이 바로 그것이다. 전자는 인간 간의 관계에서 정의의 감각을 잃지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동물, 나아가서 전 자연과 인간 간의 관계를 염두에 둔 말이다. 특히 동물을 피 째 먹지 말라는 말 속에서 우리는 동물권에 대한 성서적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동물의 생명이 인간에게 달려있기는 하지만 동물의 생명(본성) 전체를 망가뜨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수십 마리의 동물 가죽으로 만든 옷이나 동물의 본성을 보작하는 생명(유전)공학의 작업들,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말이 사치일 정도로 함부로 다뤄지는 실험실 내 동물들이 이에 해당할 수 있다. 육류 제공을 목적으로 부조리하게 사육되는 동물들, 도살 및 운송 과정에서 일어나는 잔인한 비인도적 처사들, 인간들의 필요 유무에 따라 버려진 유기견들 또한 피 채로 먹혀진 것으로서, 약속 파괴의 실상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위 두 약속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굴러간다는 사실이다. 하나가 지켜지지 않으면 다른 것 역시 지켜지지 않는 법이다. 결국 동물권은 인간 간의 정의의 감각과 처음부터 분리될 수 없는 사안임을 성서는 가르치고 있다. 인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동물권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서의 생각인 것이다.“ (동물권에 대한 신학적 소견, 새길이야기 2009년 가을호/ 이정배,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 보면, 하느님은 아담 창조 이전에도, 그리고 아담과는 상관없이, 만물 안에서 선함을 본다.......하지만 기독교 전통은 그 창시자의 확신에 따라 살지 않았다.” (생명의 해방/찰스 버치, 존 캅)

그렇다면 과연 현대를 사는 동물들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까요?


위의 인용문에 간략하게 나와 있는 것처럼 현재 인간이 동물에게 가하는 위해의 종류와 위해를 당하는 동물의 숫자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 지면에서 그 전부를 논할 수도 없고 참혹함을 다 표현할 수도 없으

나 오직 먹히기 위해 태어나는 새끼를 출산하기 위해 끊임없이 인공수정을 당하고 평생을 ‘스톨’이라 불리는 철제틀 안에서 몸 한 번 돌리지 못한 채 살다가 번식력이 떨어져 ‘생산 가치’가 없어지면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길에서 처음으로 햇살을 보는 암퇘지들,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런 마취 없이 거세를 당하고(고기에서 날 수 있는 특유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자연적 수명은 10~15년에 이르지만 움직임 없이 살만 찌워져 160일~180일 만에 도축장으로 가는 수퇘지들, 25cm*25cm의 케이지 안에서 3~4마리가 날개를 펴기는커녕 똑바로 서 있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끊임없이 알만 낳는 산란계(달걀 낳는 닭), 알을 낳지 못하는 관계로 태어나자마자 산 채로 분쇄기에 갈리거나 질식사당하는 수평아리, 인간에게 더욱 많은 가슴살을 제공하기 위해 유전자가 변형되어 비정상적인 몸무게로 인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육계.


이와 같은 ‘공장식 축산’의 끔찍함 외에도 의약품이나 화장품, 생활용품을 위한 온갖 동물실험, 오직 모피를 위해 대량 사육되고 산 채로 껍질이 벗겨지거나 털이 뽑혀 죽는 물개, 여우, 밍크, 토끼 등등 현대사회가 동물을 대하는 방식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세기 1:25)는 생명체에게 마땅히 가져야 하고, 또 생명체가 마땅히 누려야 할 존중과 존엄이 없는, 인간이 윤리의식이 어디까지 파괴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정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 동물은 고유한 본성과 가치를 갖는 ‘생명체’가 아닙니다. 인간의 ‘이용가치’이자 수단일 뿐입니다.

※ 동영상을 참조하세요 : "Meet Your Meat" from PETA


 

이 모든 사실은 동물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풍부한 감정을 지니고 있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느낀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실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이 지금 ‘나’와 ‘나의 가족’에게 일어나고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특히, 이러한 폭력이 윤리를 고민하며 그 누구보다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할 종교(기독교)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 교리에 의거하여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모든 기독교인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19세기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된 동물보호운동의 주축이 되었던 사람들 중에는 성직자 등 기독교인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노예제도 폐지운동으로 유명한 윌리엄 윌버포스입니다. 그는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평생을 싸웠으며 훗날 세계 최초의 동물보호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습니다. 윌버포스는 동물문제를 노예제도와 같은 ‘윤리의 문제’로 바라보았습니다.


4세기의 초대 교부 중 한 사람이었던 크리소스톰은 기독교인들이 동물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고 역설했고, 성 프랜시스 역시 동물들을 ‘나의 형제이자 자매’라고 불렀습니다. 알버트 슈바이처 역시 신학자이자 목사로서 인류 뿐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사랑을 평생의 철학으로 삼았습니다.

현대를 사는 기독교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동물을 사랑하여 동물보호, 동물권 운동에 동참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세계를 지배해 온 역사의 방대한 내용을 볼 때 이는 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뿐만 아니라 개인의 범위를 넘어서서 교회와 교리, 신학이 동물에 대한 시각을 달리하지 않는 한 기독교가 주장하는 대로 동물의 본래적 가치는 여전히 인간의 저 밑에 위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까 라는 질문을 제기해 볼 수 있습니다.


몇 달 전 우연히 인터넷에서 보게 된 인상적인 영문 칼럼은 이에 대한 깊은 고찰을 보여줍니다. 글쓴이는 기독교인으로서 공장식 축산에 대한 비디오를 보게 된 후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의 육식 습관이 과연 윤리적, 영적으로 타당한가에 대한 의문을 제시합니다.

여러 가지 조사 끝에 글쓴이는 아마 현대에 예수가 살아있다면 채식을 했을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궁극의 선한 목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해마다 ‘수조마리가 넘는 피조물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부추기는 생활습관’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글쓴이의 생각입니다. (번역본은 이곳을 참조하세요 - http://blog.daum.net/projecta2013/77)


성경에서 표현된 도덕률은 인간의 한계를 감안한 ‘최소한’임을 생각해 볼 때, 그리고 예수가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도덕률의 지경을 어디까지 넓혔는가를 생각할 때 저 역시 글쓴이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예수의 일생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공동체의 범위를 확대해 나간 인생’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당시 ‘부정한 자’로서 유대인 공동체에 속하지 못했던 장애인이나 성매매 여성들, 사마리아인과 같은 이방인들과 접촉하고 함께 식사를 했으며 그들에게 ‘모두에게 공평한’ 하느님의 나라를 전파함으로써 당시의 종교적 율법과 관습으로 인해 동물 같은 취급을 받았던 이들, ‘인간 존엄’의 테두리에서 쫓겨났던 이들을 공동체 안으로 품어야 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다면 2000년 전의 이스라엘과 달리 인권의 개념이 성립되고 노예가 해방되었으며 성의 평등이 논의되는 현시대의 예수는 과연 동물이 받는 억압과 폭력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질까요?

인간을 억압하는 관습에 대해 명백하게 반기를 들었던 예수는 ‘인간의 동물이용’이 뿌리 깊게 관습화 된 현대사회에 어떤 화두를 던질까요?

‘동물은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으므로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라고 결정내리지 않을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아마도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요.

“공동체에 속한 책임 있는 구성원이라면 그 공동체에서 박탈당한 생명 가진 모든 존재들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의의 강력한 의미이다.....우리가 서로 운명을 공유하는 것이 관건이다”

운명 공동체로서 동물을 받아들이고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그들의 고통을 없애주는 것은 인간의 책임입니다. 그것이 동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이자 예수의 사랑일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언제나 눈을 커다랗게 뜨고 생명을 억압하는 체제에 의문을 던지는 법이며 그 대상에 한계를 두지 않는 법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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