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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생명사상과 환경문제/김용정교수
한채연 2004-12-30 10:58:37

불교의 생명사상과 환경문제 -생태윤리와 환경윤리

김용정 (동국대 철학과 교수)

1. 생태학적 페러다임

" 현재 퇴색하고 있는 페러다임은 수백년동안 우리 문화를 지배해왔다. 그것은 그동안 현재 서양사회의 모습을 형성하여 왔으며 세계의 다른 지역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이 페러다임은 수많은 사상과 가치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에는 우주를 기본적인 토막(elementary building block)으로 이뤄진 역학적 시스템으로 보는 견해, 인간의 몸을 기계로 보는 견해, 생명을 존재를 위한 투쟁으로 보는 견해, 경제적 기술적 성장을 통하여 끝없이 물질적 진보가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 마지막으로 말하지만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서 - 여성들은 어느 곳에서든지 남성들에게 종속되어 있는 사회가 "자연스런"사회라는 믿음 등이 있다.

최근 수십년 동안 이런 모든 가정들은 심각하게 한계가 있으며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상은 프리죠프 카프라의 말이다.

오늘날 과학의 페러다임에 관한 분석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다각도로 연구되어 왔다. 원자론 내지 기계론적 세계관이나 환 平聆퓽 세계관이 하나의 한계점을 갖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신과학운동이나 holon의 사상 더나아가 동양의 유기적(有機的) 전체론적(全體論的) 페러다임이 바람직한 것은 사실이나 아직도 환원주의적 내지 원자론적 인과적(因果的) 결정론(決定論)을 충분히 뒤엎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카프라는 실제로 페러다임의 수정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수정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지금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패러디임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기술될 수 있다. 陋痼 세계를 분리된 부분들의 집합체라기 보다 통합된 전체로 보는 전일적 세계관(holistic worldview)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생태학적 세계관(ecological worldview)으로 부를 수 있다.

나는 '생태학적'이라는 용어를 일반적으로 쓰이는 의미보다 더 넓고 깊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와 같은 깊은 의미에서의 생태학적 인식은 모든 현상들은 근본적으로 상호 의존하고 있으며 개인과 사회가 자연의 순환과정에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이런 깊은 생태학적 자각은 우리 사회의 여러 방면에서 그리고 과학의 안팎에서 나타나고 있다.

카프라는 생태학적 페러다임은 그러나 일반적인 과학의 틀을 넘어서는 일종의 정신적 통찰이 함축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하고 있다. "생태학적 페러다임은 현대 과학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의 틀을 넘어서 모든 생명의 일체성, 다양한 현상들의 상호 의존성, 그것의 변화와 변형의 순환성 등으로 나아가게 하는 실재에 대한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궁극적으로 그런 깊은 생태학적 자각은 정신적인 자각이다.

인간 정신이 각 개인은 전체로서의 우주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는 의식의 형태로 이해될 때, 생태학적 자각은 본질적으로 정신적이라는 것이 명백해지고 실재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 정신적인 전통에 대한 통찰과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간단하게 환경의 문제를 불교의 탐욕 내지 불살생의 교리와 연관하여 생각해 보았다. 필자는 무엇보다 급선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생존의 욕망에 대한 근본적인 분석에 관한 것이다.

지구 환경에 대한 위기 의식과 새로운 전환의 요구가 불가결한 것이지만 아직 그것은 시작에 柰墟求. 진정한 자연에 대한 보호와 공생의 길을 찾기 위해서는 탐욕에 의한 과소비 문화에 물든 현대인들을 어떻게 근본적으로 자각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인종이나 국경과 관계없이 혼을 갖고 그 활동으로 공생하여 왔는데 그것은 한 종족만이 아니고 나무, 어류, 돌에도 혼이 있으며 그와 같은 만물의 혼까지도 중요하게 하지 않으면 지구는 파멸하고 만다. 만물공생(萬物共生)의 고삐가 되는 혼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오늘날 공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위의 말은 1988년 일본 북해도에서 열린 국제 선주민(先住民)회의에 출석한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의 한 사람이 일본의 아세아 문제전문가 견행(見行)의 공생에 관한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대답한 것이다.

[공생(共生 symbiosis)]이라는 말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최근에 생태학적 개념으로 널리 쓰이는 개념으로서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페러다임의 키워드가 되고 있다.

오늘날 환경윤리학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가지 문제를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다.

1. 자연속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들의 생존권의 문제이다.

즉 동물권, 식물권은 인권과 함께 생태학적 殆貶【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중심주의 내지 인간우월주의를 부정하고 범생명주의를 지향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생태학적 사고에 입각한 윤리학이다.

2. 현세대에 사는 우리들은 다음 세대내지 미래세대들의 생존가능성에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현세대의 환경파괴는 미래세대의 생존권을 부정을 의미하며 가해자요 파괴자가 되는 것이다. 지구의 생태계는 닫혀진 체계이며 유한한 세계이다. 따라서 중요한 문제는 현세대와 미래세대의 배분의 윤리가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지구환경의 문제를 극복하려면 인간중심의 개발페러다임에서 범 생명의 공생가능한 지구환경 페러다임으로 학적 태도가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환경윤리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에서 상당한 기간동안 다각적인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고 UN을 통한 국제적 협력체제가 보다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먼저 각 나라가 해야 할 일은 환경보전의 비용염출을 위한 환경세의 신설, 대체에너지의 개발,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는 제 기술 시스템의 연구, 개발체제의 정비, 파괴의 지표라고 불리는 GNP를 대신할 새로운 환경지표의 도입, 환경교육을 위한 새로운 교과목의 신설 등에 착수하는 일이다.

이제 지구환경안전보장의 문제는 최고의 선결문제(最高類)라는 개념의 위치로 부각되고 있으며 따라서 각 국가안전보장의 문제는 종(種)개념으로 전자에 포섭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 안전보장을 위해서 개발 축적한 핵무기를 비롯한 제 군사무기들은 더이상 국가를 지켜줄 방패가 되지 못하리라는 것은 지구환경안전보장의 차원에서 보았을 때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실로 어려운 문제가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UN의 환경개 常맛(몬트리올 회의나 리우회의와 같은 활동)를 보다 격상시켜 거기에서 전술한 두가지의 안전보장문제가 해결되도록 노력해가야 할 것이다.

아무튼 지구환경문제와 관련한 국제회의에서 제기된 문제들은 환경보전문명을 하나의 이념으로 세우고 자연과 문명의 양립, 지구적 규모의 생태계의 보전과 평화의 양립 가능한 새로운 세계관이 필요하며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와 연결되는 시장경제체제가 점진적으로 환경보전과 생태윤리학적 공생의 복지경제형 체제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아무튼 어떤 방식으로든지 지금의 성과와 소비위주의 체제를 억제하지 않는 한 지구세계와 인류가 파멸의 위기를 맞게 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대적 위기현황에 있어서 전술한 인간중심주의 내지 인간의 탐욕을 증대시키는 소비위주의 체제를 완화하고 자연환경을 되살리고 보전하기 위해서 제과학이 불교의 중도사상, 연기사상, 무아사상, 자비사상을 과감하게 도입수용 한다면 21세기의 새로운 페러다임을 창출해내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지금 그린피스등 환경단체들이 각 방면에서 환경운동을 벌이고 있으나 좀 더 개개인에게 직접 접근하여 환경정화운동을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종교계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동서고금을 통해서 종교야말로 인간정화를 근본문제로 삼아왔기 때문이요. 또한 사찰이나 교회에서 쉽게 집단적으로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고 평화롭게 환경운동을 전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환경의 오염은 결국 인간에게 그 책임이 있기 때문에 먼저 인간의 정화가 있고서야 환경의 정화가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불교는 물론 각 종교단체가 앞장서서 인간학적인 자각을 통하여 인간정화의 길 환경정화의 길에 나서야 할 것이다.

2. 불교의 환경윤리

상응부경전(相應部經典)에 의하면 붓다가 정각을 한 후 이른바 선인처, 녹야원에서 다섯비구를 만나 최초로 설한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출가자(수행자)는 두개의 극단에 가까이해서는 안된다. 그 두개란 무엇인가 그 하나는 온갖 욕망에 오직 애착(愛着)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열등하고 비천한 것이다. 범부의 소행으로서 성스럽지 못하다. 그리고 무익하다. 둘째는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으로서 그것은 단지 괴로움뿐이고 성스럽지 못하다.

그리고 무익하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두개의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깨달았다. 그것은 눈을 뜨고 지혜를 낳고 적정(寂靜)과 증지(證知)와 등각(等覺)과 열반(涅槃)에 도움이 된다. 그런데 비구들이여 내가 깨달은 중도(中道)란 무엇인가? 그것은 거룩한 팔정도(八正道)이다. 이른바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우리가 금욕주의와 쾌락주의를 놓고 보았을 때, 그 어느 쪽도 극단적인 고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의 근본사상이 연기법(緣起法)에 있거니와 그것은 항상 조건적인 유동적 생기(流動的 生起)를 의미하기 때문에 결코 고정적(固定的) 입장을 허용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현금(弦琴)의 현(弦)의 완급(緩急)의 적도(適度)에서 조화의 음악이 연주되는 것처럼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욕구(欲求)의 적도(適度)의 조절에서 진정한 만족이 얻어 지는 것이다.

불교 경제학자 슈마허는 오늘의 산업사회에 있어서 앞으로 바람직한 것은 중간 레벨의 산업사회를 구축해야 한다고 하였다. 오늘의 환경오염의 근본문제가 인간의 탐욕에 기인하는 만큼 붓다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갈애(渴愛)와 탐욕(貪欲)을 떠나야 한다고 강조하였는가 하는 점을 주의 깊게 통찰해야 한다. 불교는 결코 욕망을 버리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탐욕(貪欲)을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붓다는 엄한 수행(修行)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회의에 빠진 소오나와의 대담에서 소오나에게 현금(弦琴)을 탄주(彈奏)하려면 현(弦)이 너무 강하게 잡아 당겨져도 안되고 너무 느슨하게 늘어져도 안된다는 비유를 들고나서 '중(中)을 취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중국철학에서는 중용(中庸)에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게 '진실로 중(中)을 잡으라 : 윤집궐중(允執厥中)'라고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평형(平衡)의 중(中)(Mesotes)을 실천적 덕(德)의 기준으로 삼았거니와 붓다의 중도(中道) 역시 중(中)을 욕망의 처리에 있어서 모든 실천의 원리로서 삼았던 것이다. 물론 붓다의 중도(中道)의 논리(論理)는 그 보다 훨씬 넓은 의미의 중관철학(中觀哲學)을 함축하고 있지만 실천적인 원리로서의 중용의 의미 함축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불살생(不殺生)의 계(戒)가 제 1의 보살계(菩薩戒)가 되는데, 그것은 일체 중생에 대한 자비(慈悲)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자연을 보호하는 정법(正法)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주나 자연 자체가 온갖 생명들의 처소요, 거주지이며 동시에 자연 자체가 또한 총체적 생명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곧 살생죄(殺生罪)를 범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대살차니건자경(大薩遮尼乾子經)은 다음과 같이 자연의 파괴가 살생을 범하게 된다는 것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성읍(城邑)이나 촌락과 산림, 천택(川澤)과 동산, 궁전과 누각 모든 도로와 교량, 자연적인 굴택(窟宅)과 일체의 농작물, 꽃들과 열매, 초목(草木)과 총림(叢林) 등을 태워서는 안되며 파괴하지 말아야 하며, 물을 빼대지 말며, 자르거나 베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에는 다 생명을 가진 짐승들과 곤충들이 있으므로 그 죄없는 중생들을 상하게 하거나 그 목숨을 해치게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상의 불살생(不殺生)의 계율들은 사실상 현실적으로 실천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킷澯척育 이른바 세속오계(世俗五戒)중에 살생유택(殺生有擇)의 계(戒)가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일체의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과 존엄성을 그 만큼 강하게 제기함으로써만 유기적인 공생(共生)의 윤리가 확보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모든 중생에 대하여 적의(敵意)가 없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정법염처경(正法念處經)에는 불살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어떻게 살생하지 않는가. 혹 길을 가다가 개미, 지렁이, 두꺼비나 그 이외의 곤충을 보더라도 그것들을 피해 멀리 우회하여 간다. 그것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심(無心)한 살상이나 의사가 병을 치료하다가 잘못되어 짓는 살상등은 살생의 죄를 얻지 않는다. 또 이 경(經)의 다른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른바 선(善)이라고 하는 것은 살생을 떠나 세상의 모든 중생을 거두어 줌으로써 그들을 두려움이 없게 하는 것이다... 모든 법(法)은 목숨으로 근본을 삼고 사람은 다 제 목숨을 보호한다. 그러므로 살생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 목숨을 주는 것이요, 목숨을 주는 것 모든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일 가는 보시란 이른바 목숨을 주는 것이니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은 천상(天上)에 태어나는 인(因)이 된다."

이것은 한마디로 불살생의 공생의 근본원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여 다른 생명을 빼앗지 않는 것이 곧 생명을 주는 것이 된다는 말은 대부분의 중생들이 서로 타자를 살생하여 자기의 생명을 부지해 나가는 모순속에 있기 때문에 상호간에 어떤 희생은 운명적인 것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나의 생명을 줄만큼 다른 생명을 아끼고 죽이지 않는 것이 바로 생명을 주는 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經)은 또 이렇게 설하고 있다.

" 이 불살생은 가장 큰 업(業)이요, 또 정법(正法)의 종자(種子)로서 생사에 헤매일 때에는 오직 살생하지 않는 것이 귀의할 곳이 되고 구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생사의 어둠속에 들어가서는 이 불살생을 등불로 삼아야 한다."

불교의 이념이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에 있다고 하거니와 이 명제는 누구나 알고 있는 말이다. 지혜를 구하여 수도를 하는 것은 결국 일체중생을 구제하려는 데 있다.

'중생'이라는 말은 범어의 Sattva(살타 깟)라는 말의 역어로서 당나라의 현장(玄裝)이전에 번역 사용된 말이다. 현장이후에는 정식(情識)이 있는 생물을 가리키는 유정(有情)이라는 말로 번역 사용하여 왔다. 인도 철학이나 불교의 용어들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중생이라는 말도 다의적(多義的)인 뜻이 있어 윤회전생(輪廻轉生)하는 생명이라는 뜻도 있고 뭇 생명이 함께 산다.

즉 공생한다는 뜻도 있으며 또한 미계(迷界)의 모든 생류(生類)들을 일컫기도 한다. 아마도 그것은 보리살타(Bodhisattva), 즉 각유정(覺有情), 다시 말해서 오계(悟界)의 구도자와 구분 臼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중생연자비(衆生緣慈悲)니 중생인(衆生忍)이니 중생회향(衆生廻向)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깨닫지 못한 온갖 중생들을 보고 일으키는 자비심이나 구도자가 다른 중생들에게 해로움을 받더라도 참고 성내지 않고 적의를 갖지 않아야 하는 인내심, 더 나아가 일체 중생들을 해탈케 하기 위하여 자기가 쌓은 공덕을 저들에게 돌려주는 일 등에서 보더라도 역시 유정(有情)과 각유정(覺有情)의 차이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3. 21세기의 환경전략

우리가 21세기에 있어서 문명계(文明系)와 徽째(生態系:環境)의 조화를 이룩할 새로운 페러다임을 창출해 내기 위해서는 먼저 현대의 과학적 인식의 변화된 인식체계를 반성해 보지 않으면 안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뉴턴 물리학적인 고전적 인식체계는 인과적 결정론(因果的 決定論)이었다. 즉 인과적 결정론이란 우주의 현시점의 상태를 알면 미래의 전시점의 상태를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인식체계이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의 두 영역, 즉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자연인식체계는 전통적인 환원주의적 인식체계에 대하여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 육 하였다.

오늘날 상대성이론에 있어서는 일양적(一樣的)인 시간의 흐름, 등방적(等方的)인 공간의 등질성(等質性)은 부정된다. 더우기 공간과 시간은 서로 독립적인 것이 아닐뿐더러 사차원 시공연속체(四次元時空連續體)로서의 우주에 있어서는 모든 시공점은 상대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시공점이 상대적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을 인식하는 사람들의 위치와 시간이 다르면 인식하는 대상이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즉 인식주관(좌표계)의 시공점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한편 양자역학(量子力學)에 있어서는 자연을 관찰하는 관찰주관이 어떤 대상을 관찰하기 위해서 관측조작을 할 경우 그 관찰조작이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미시적인 소립자(素粒子)의 세계에 있어서는 예를 들면 어떤 전자(電子)의 위치와 속도을 알기 위하여 관측조작을 하면 즉 빛을 비추면 광자(光子)가 전자를 때려 전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결정할 수 없는 불확정한 사태가 발생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이젠베르크는 한 알의 입자(粒子)의 운동은 전 우주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던 것이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 것은 주관(主觀)과 객관(客觀)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특히 양자론(量子論)이론에 있어서는 에너지의 장(場)과 물질이 별개의 것이 아니고 에너지의 희박한 상태가 장이고 에너지의 집적의 상태가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물질과 장의 통일의 이론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자연인식의 체계들은 전통적인 원자론적 기계적 세계관에서 유기체론적(有機體論的)인 전체론(全體論)의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새로운 자연인식의 체계에서 새로운 사회인식, 새로운 세계인식으로 전환해 가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오늘의 문명계와 생태계의 조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근대문명을 형성해온 과학과 과학기술의 전환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전통적인 과학과 과학기술은 생태계에 대한 반성없이 무제한으로 자연을 개발하고 지배하는 차원에서 응용되어 왔다. 근대적인 산업사회는 물질을 기초로 하는 공업생산을 위주로 살아왔으며 거기에 토대를 둔 자본주의적인 시장경제시스템은 생태계에 있어서의 물질과 에너지 순환의 과정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이윤극대화를 목표로 한 자기 완결적인 재산증식을 전개하여 왔다.

그리하여 자연환경에서 석탄, 석유, 광물자원 등을 대량으로 발굴하여 생산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생산과정에 투입되었다. 여기에서 생산물의 대량생산이라는 긍정적인 과정만이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거기에 따른 엔트로피 증대의 부정적 과정은 무시되어 왔다. 이 때문에 생태계의 순환과정의 한계를 넘어 대량의 폐기물과 폐열이 방출되어 자연환경의 오염과 파괴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명계에 의한 자연 환경파괴를 극복하려면 문명계에 있어서의 물질.에너지의 廢 鄕ㅀ 생태계에 있어서의 물질 에너지 순환과정이 근본적으로 매개 통일될 수 있는 새로운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을 조화시킬 수 있는 길은 자연과 인간의 물질대사를 매개하는 정보처리능력을 창출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문명계의 과학기술이 자연환경을 파괴하게 되는 것은 에너지의 낭비적인 기술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는 데 있다. 이것은 단지 공업기술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농업생산에 있어서도 똑같이 해당되는 말이다. 현대의 농업생산에 있어서도 자연의 흡수이용효 꼭 나쁜 화학비료와 농약의 과다한 사용이 물질.에너지의 조화있는 순환과정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은 상식으로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현대의 생산기술이 에너지의 낭비적인 시스템이라고 하는 것은 미생물의 분해작용에 상당하는 기술이 발달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과학기술의 문명계는 물질을 반복이용하고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개방적 정상계(正常系)로 발전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산품의 생산이라고 하는 긍정적 과정에 대한 기술과 함께 투입된 저(低)엔트로피원(源)이 (高)엔트로피의 폐기물.폐열로 변하여 방출되는 부정적 과정에 대한 기술이 동시에 개발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주지하는 바와 같이 화력발전소나 제철소에서는 대량의 중.저온(中.低溫)의 열이 배출된다. 이 열을 다른 산업의 열처리공정에 이용하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발전효율은 40%로 알려져 있으나 폐열을 다른 화학공정에 원용한다던가 철강업의 고온을 제철공정에 이용할 경우에는 에너지의 70%이상을 유효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컨대 고엔트로피문명에 의한 무질서의 증대를 어떻게 다시 저엔트로피의 질서의 상태로 전환시키느냐 하는 복원(復元)기술을 개발하는 일이다.

물론 사전에 자연을 보호하는 제반조치가 따라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바이오 테크놀로지(예를 들면 유전공학)를 발전시켜 병이나 해충을 이겨내는 강력한 농작물을 만들어 내어 농약의 사용을 극소화하고 생태계의 부담을 경감시켜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것과 같은 다각적인 기술이 개발되어야 한다.

최근에는 농공복합체(農工複合體)의 바이오매스 에너지 개발의 문제가 크게 대두되고 있다. 농공복합체에 있어서의 제 산업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산업군(産業群)으로 나누어 분석되고 있다.

1. 바이오매스 재생산업군 : 이 첫째의 산업군은 바이오리소스를 생산하는 것으로서 생물 산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2. 바이오매스 가공산업군 : 이 산업군은 생물자원을 원료로 하여 그것을 가공하는 산업으로서 발효공업(醱酵工業)을 중핵으로 하여 식품, 제지, 의약. 화장품 등을 생산하는 것이다. 또한 이 산업군은 A공업의 제품이 B공업의 출발원료가 되고 다시 B의 제품이 C공업에 인계 이용되는 일종의 순환적인 상호의존적 바이오매스 산업기술이라 할 수 있다.

3. 바이오매스 회귀가공(回歸加工)을 실현하는 산업군이다 : 메틴발효. 열분해 등이 포함되며, 토양개량재(土壤改良材). 연료(燃料) 등을 제조하여, 이것을 재생산업에 피드백하는 정맥산업군(靜脈産業群)이다. 말하자면 폐기물을 최소화하려는 산업이다.

그 외에 경제시스템과 생태계 시스템을 통일하는 순환적 총체적 시스템의 개발, 인간의 모든 행위에 의한 세계와 자기와의 통일의 문제, 전인격적 생활의 성립과 역사적 생명의 발현의 문제 등 형이하적(形而下的) . 형이상적(形而上的) 제 문제들이 다각적으로 연구.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전략은 국부적인 해결책밖에 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는 불교적인 세계관과 인생관을 통해서 인간자신의 탐욕을 진정시키는 자기정화(自己淨化)의 길에 나설 때 자연의 정화로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현대의 인간의 타락과 환경오염으로 인한 세계의 위기는 결국 불교가 가르치는 바와 같이 인간의 무명(無明)에 의한 탐진치(貪瞋痴)의 삼독(三毒)에 연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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