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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동물해방
한채연 2004-12-24 16:12:34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론

고대학술지 「철학연구」제 22집 (1999년 6월 발행)

1
대부분의 우리 나라 사람들은 외국사람들이 개고기 먹는 것을 비난하는 데에 대해서 불쾌함을 감추지 못한다. 왜 남의 나라의 문화에 할 일 없이 간섭하느냐고 반문하고 너희들이 먹고 있는 쇠고기나 돼지고기가 개고기와 어떠한 차이가 있느냐고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동물에 대한 도덕적인 고려에 관한 한 거의 불모지라 할 수 있는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외국에서 한 겨울에 모피를 입는 것에 반대한다고 맨 몸으로 드러누워 있는 사람들의 항의 시위 기사를 고개를 갸우뚱하며 읽으며 다음과 같은 반응을 나타낸다

: 돈이 많으니까 별짓을 다하는군! 아무러면 어때? 어차피 동물은 결국 동물 아니야? 그런데 도덕적인 원리에 의거하여 엄정하게 생각해 보면 이와 같은 우리들의 반응이 철저하게 인간 중심적인 편협된 사고 방식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동물의 고기를 아예 먹지 않으려는 자세 및 그들을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노력은 불가피한 도덕적 요구인 것이다.

이와 같은 도덕적인 요구를 실천에 옮기려는 운동을 일괄적으로 동물 해방 운동(Animal Liberation Movement)이라 부른다.

동물 해방은 말 그대로 동물을 동물원의 우리나 농장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동물이 해방되었을 경우 갈 곳이 어디냐고 물으며 모든 집이 동물 농장이 될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동물 해방론의 본질을 곡해한 것이다.

동물 해방론자들이 말하는 해방은 단순히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해방이란 일상인들이 갖는 사고를 전환시킴으로써 동물 또한 도덕적 고려의 대상임을 분명히 하고 동물들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주는 것을 일컫는다.

동물 해방론을 대표하는 철학자는 피터 싱어(Peter Singer)이다. 그가 자신의 주저 {동물 해방(Animal Liberation)}의 서문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그의 책은 애완 동물을 사랑하라는 권고를 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 아니다.

특히 그는 아파트나 부잣집의 따뜻한 방안에서 아프리카의 난민들보다 훌륭한 식사를 하며 살아가는 애완 동물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싱어가 관심을 갖는 대상은 평생을 굶주리며 제대로 움직여 보지도 못하고 살아가다 보신탕 집 뒤뜰에서 매를 맞으며 죽어 가는 잡종견, 공장식 농장에서 오직 인간의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전 생애를 고통 속에 살다가 삶을 마감하는 온갖 가축들, 그리고 좁은 우리에서 실험 대상이 되어 죽을 날만을 기다리며 살다가 고통 속에 죽어 가는 실험실의 동물들이다.

사실 개에 국한시켜 말을 하자면 잡종견이라고 해서 순종 견들에 비해 고통이나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잡종견이 비싼 순종 견들에 비해 대접을 받지 말아야 할 별다른 이유가 없다.

예컨대 사람의 경우 혼혈이라고 해서, 또는 유색인종이라고 해서 대접을 받지 못하고, 희귀한 인종들이라고 해서 더욱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누군가가 말을 했을 경우 그는 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웃음을 살 것이다.

하지만 개의 잡종과 순종을 구분하지 않고 동등하게 그들을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오히려 그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은 비웃음을 산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잡종에 비해 순종이 더욱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단순히 희귀하고 비싼 것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는 인간의 마음이 반영된 것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이는 인간 중심적 사고 방식인 것이다. 도덕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는 분명 일관성 있는 추론이라 할 수 없다.

본 논문에서는 도대체 어떠한 이유에서 인간 아닌 동물들이 도덕적인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그 논변을 반대하는 입장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으며 왜 동물에 대한 도덕적인 고려를 반대하는 입장이 옹호될 수 없는가를 동물 해방론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피터 싱어(Peter Singer)의 입장에서 살펴 보도록 하겠다.

2
동물도 도덕적인 고려의 대상이어야 하는가를 검토해 보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이 왜 평등한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간은 왜 평등한가? 만약 평등이 사람들간의 실질적인 평등에 기초하고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인간 평등의 이념을 고수할 수 없을 것이다. 분명 사람들간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인간의 평등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라, 인간을 사랑하라는 말을 너무나도 흔하게 들으며 살아가고 있으며, 또한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도대체 이웃은, 인간은 왜 사랑의 대상이며, 존중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단지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것인가? 만약 여기에 긍정적인 답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사고 실험을 해 보라고 권해볼 수 있다

: 먼 장래에 인간과 생김새는 크게 다르지만 같은 정도의 합리적인 사고 능력을 지닌 외계인을 만나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라. 이 때 그 외계인은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아닌가?

아마도 이와 같은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계인 또한 도덕적인 지위를 갖는다고 답변을 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왜 우리가 외계인들을 도덕적으로 고려하고자 하는가이다.

그들이 갖는 우리와 동등한 합리적인 사고 능력 때문인가? 만약 그렇다면 합리적인 사고 능력을 결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은 도덕적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는가?
만약 제외되지 말아야 한다면 합리성을 결한 사람과 동등한 정도의 합리성을 갖춘 동물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서 윤리학자들은 나름대로의 답변을 제시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들을 동물에게 고유한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권리론자들과 쾌고감수 능력(sentience)을 기준으로 도덕적인 고려의 대상을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공리주의자들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3
1)권리론자
동물의 도덕적 권리와 관련해서는 크게 4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첫째 인간과 인간 아닌 동물 모두에게 기본적인 권리가 있음을 부정하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입장을 대표하는 사람으로는 모티모어 아들러(Mortimer Adler)와 메리 밋글리(Mary Midgley)가 있다.

아들러의 생각에는 인간 아닌 존재들에게는 도덕적 중요성이 부과되지 않는다. 그리고 만약 인간이 다른 종 구성원들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면, 인간 또한 그와 같은 중요성을 가질 수 없다.

둘째, 인간과 일부 동물에게 동일한 기본적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의 입장이 있다. 그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게 기본적인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슈바이처와 같은 입장을 고수할 경우 우리는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가령 식물과 인간이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면 식물을 먹는 것도 권리 침해이기에 도덕적으로 금지되어야 할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세째, 인간에게만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입장이 있다. 그러한 입장에 의하면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분명 우월한 능력을 갖추었다. 그로 인해 우리는 다른 동물에 비해 더 많은 권리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이 동물보다 많은 능력을 갖추었다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능력이 인간의 우월한 권리를 정당화시키는 것일까?

이는 크게 6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각각의 논변이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도구를 인간만이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딱따구리는 선인장 가시를 이용하여 먹이를 잡아먹으며, 침팬지는 나뭇잎을 씹어 물을 적실 스펀지를 만든다.

이렇게 본다면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근본적인 차이가 될 수 없다. 여기서 혹자는 도구도 도구나름이 아니냐고 주장하며 가령 컴퓨터나 비행기 등의 도구는 동물들이 만들어내지 못하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고차적인 도구를 가지고 인간의 우월성을 확인하려 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소위 원시 생활을 영위하는 인간 집단 또한 차별의 대상이냐고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뚜렷한 답을 하지 못한다면 도구 사용이 근본적인 차이를 초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2)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한다.
이 또한 양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가령 침팬지나 고릴라등 유인원이 기초적인 언어를 습득하였다는 보고가 있으며, 비록 인간 차원에서의 언어는 아니더라도 상호 의사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고래나 돌고래가 갖추고 있다는 것은 거의 상식에 속한다.

또한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팔다리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없는 장애인이 있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람을 도덕적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언어 사용을 인간이 우선적인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논변의 버팀목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아마 거의 모든 사람이 그럴 것인데) 언어 또한 인간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

(3)인간만이 도덕적 행위자로 간주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인간만이 도덕적 판단을 내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이 전적으로 옳은 생각은 아니다. 가령 도덕적 판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감정이입의 능력을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해서 제임스 레이찰즈(James Rachels)는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행해진 한 실험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실험에서 상당수의 리서스 원숭이는 굶주리느냐 동료에게 강한 쇼크를 가하느냐의 선택의 기로에서 설령 며칠을 먹지 못해도 굶주림을 선택하였다고 한다.

원숭이들의 이와 같은 선택은 도덕에서의 핵심 요소인 감정 이입적인 행동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우리는 정상적인 성인이 아닌 사람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가령 아기, 어린아이들, 정신병자, 정신지체인들은 도덕적 행위자로 간주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들이 도덕적인 권리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인간의 지능이 동물의 지능에 비해 높다.
이와 같은 논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반박이 가능하다. 가령 인간이라는 종 안에서도 지능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런데 만약 지능의 차이에 따라 권리가 달리 부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능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면 피부색이나 몸의 크기 등이 기준이 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침팬지, 심지어 개나 고양이들은 일부 불행한 인간들에 비해 지능이 높다. 이 때 이들 동물들이 일부 인간들에 비해 더 많은 권리를 갖는 것일까?

(5) 인간에게는 이성 능력이 있다.
이성주의적 전통하에 있는 사람들은 이성 능력이 도덕적인 고려를 하는데 결정적인 요소라고 말한다. 그들은 오직 인간만이 그와 같은 능력을 갖추었으며 이에 따라 인간 아닌 동물들은 도덕적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들에게 대한 아무런 직접적인 의무가 없다. 우리가 무엇을 하건 그들에 대해서 행한 것은 나쁜 행동이 아니다. 문제가 되는 행동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미칠 영향으로 인해 금지될 따름이다.

이와 같은 견해를 대표하는 철학자는 폭스(Michael Allen Fox)이다. 폭스에 따르면 비판적인 자의식, 복잡한 개념을 조작할 능력과 정교한 언어를 사용할 능력, 그리고 반성 . 계획 . 숙고 . 선택 . 행위의 책임을 받아들일 능력을 갖춘 존재만이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된다.

한 존재는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자율적일 수 있으며 이성적인 도덕적 행위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때 도덕적 공동체에서 제외된 존재는 모두 동일하게 다루어져도 되는 것일까? 가령 돼지를 때리는 것과 나무나 시계를 때리는 것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일까?

이성 능력과 관련한 논변에 대해서 우리는 위에서 제시했던 반론들을 동일하게 적용해 볼 수 있다. 즉 일부 인간들은, 심지어 정상적인 성인마저도 항상 이성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며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이성적"이란 기준 또한 적합한 기준이 되지 못한다.

(6) 인간이라는 사실이 권리를 갖는 이유가 된다.
위에서 우리는 인간과 인간 아닌 동물들 사이를 분명하게 갈라놓을 수 있는 선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험 과학은 양자를 선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어떤 사실적인 기준으로 양자를 구분하려 할 때에는 반드시 일부 인간들이 제외되거나 일부 동물들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결론에 불만을 갖는 일부 철학자들은 단지 인간이라는 사실이 권리를 갖는 이유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전형적인 인간 중심적인 사고이다.

그와 같은 주장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또는 남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스스로가 더욱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네째, 인간과 일부 동물들이 가치를 갖긴 하지만 양자간에는 차이가 있다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일상인들이 흔히 취하는 입장이며 본래주의(inherentism)가 이와 같은 입장을 대표한다.

본래주의는 궁극적인 가치의 소재를 어떤 정신적인 능력에서 찾지 않고 개체가 가지고 있는 본래적 가치에서 구한다. 개체가 소유하는 가치는 칸트의 "목적 그 자체"라는 관념에서 따온 것이다.

하지만 칸트주의자들이 오직 인간만을 목적 그 자체라고 생각함에 반해 본래주의자들은 이성적 존재인 인간 외의 동물들도 일정한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입장을 대표하는 철학자로는 레건(Tom Regan)을 들 수 있다.

레건에 따르면, 고유의 가치(inherent value)를 갖는 존재는 어떠한 존재이건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존재는 다른 것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레건은 삶의 주체(subject-of-a-life)가 되는 존재는 그 존재가 어떠한 존재이건 도덕적 지위를 부여받는다고 주장한다. 삶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살아 있다는 것과는 다른 것이며, 이러한 삶에는 욕구, 지각, 기억, 감정등 복잡한 일련의 특징들이 포함된다.

이와 같은 기준으로 볼 때 일부 고등 동물들은 자기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들은 얼마만큼 자기 삶의 주체가 되느냐에 따라 고유의 가치를 가지며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존재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가 없다.(이는 공리주의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레건의 논변에 대해 간단히 대응하자면 다음과 같다.
레건이 말하는 삶의 주체라는 기준은 "정신적으로 정상적인 1살 이상의 포유류"에나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기준이 된다면 아마도 레건이 원치 않은 결과가 도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삶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수많은 존재들(일부 인간과 고등동물을 포함해서)이 있을 것이고 그들은 일정한 가치를 부여받을 수 없다.

본질적으로 레건의 주장은 인간이 이성적이기 때문에 더욱 가치 있는 존재라는 기준을 조금 복잡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공리주의자

우리는 위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권리론자들의 논변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함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주장을 어떻게 옹호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 소위 정상적이지 못한 인간을 도덕적인 고려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까? 어떤 사실적 기준을 통해 인간의 평등을 옹호해 낼 수 없다면 그 대안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공리주의자들은 최소한의 공통 분모를 찾다 보면 쾌고감수 능력(sentience)이라는 기준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고통은 그 어떠한 존재가 느끼건 고통이며 그에 대한 고려는 그 고통의 크기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공리주의적인 입장에서 동물을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논변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다.

가령 권리 이론가들에 따르면 공리주의는 고통을 제거하고 행복을 증진시킨다는 조건만 충족시킬 경우 무고한 인간 또는 무고한 인간 아닌 존재의 생명을 앗아가는 경우마저도 용인할 것이다.

그리하여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인간 아닌 동물을 보호할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될 수가 있다.
그럼에도 논자는 공리주의 이론이 인간 평등을 이야기할 때 가장 설득력이 있는 이론이라 생각하는데 이와 같은 입장을 대표하는 자로는 피터 싱어(Peter Singer)와 프레이(R. G. Frey)를 들 수가 있다.

프레이에 따르면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 아닌 동물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이며, 이에 따라 당연히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정상인 성인은 다른 존재에 비해 풍부(rich)하다는 측면에서 더욱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프레이는 인간 아닌 동물에 비해 인간이 도덕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를 따라 그는 아이들, 장애인들, 그리고 동물들이 정상적인 성인의 죽임을 정당화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죽임을 당할 수 있음을 용인한다.

다시 말해 공리를 계산하여 볼 때 만약 동물이나 일부 인간을 사용함으로써 산출되는 이익이 고통의 양을 능가한다면 동물이나 정상적이지 못한 인간들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는 본래주의와의 차이이다.)

이러한 프레이의 논변은 정상적인 인간이 더욱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려 함으로써 인간 중심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령 인간 삶의 풍부함(rich)이 차별 대우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또한 풍부함이 정확히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이와는 별도로 논자가 보기에 프레이는 공리주의의 논리를 엄격하게 따르고 있지 않다. 위에서 언급하였지만 공리주의적 기준에 따르면 고통은 누가 느끼건 동일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가령 침팬지의 상처는 심각하고 인간이 입은 상처는 경미하다고 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구급약이 하나밖에 없다면 공리주의자는 침팬지의 상처를 우선적으로 치료해 주어야 한다.

이 때 인간의 삶이 풍부하기 때문에 구급약을 인간을 위해 써야 한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러한 기준에서 볼 때 프레이는 공리주의의 논리를 일관되게 적용하고 있지 않다.

싱어는 이와 같은 한계를 극복하고 공리주의적 입장을 수미 일관되게 적용하고 있는데 다음에서는 싱어의 이익평등고려 원리를 살펴보기로 한다.

3)이익평등고려의 원리

싱어는 지능이나 합리성 등을 기준으로 한 평등 논의는 매우 임의적이라고 말하며 이는 피부의 색깔을 통한 차별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가령 지능이 높은 사람을 지능이 낮은 사람보다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할 경우 그는 상식적이지 못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합리성 또한 마찬가지다. 합리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인하여 혜택을 받게 될 사람들이 아니라면 불합리한 사람의 권리를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만약 지능이나 합리성을 기준으로 한다면 심각한 정신적인 결함을 갖는 자들은 도덕적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될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등을 고려할 때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공리주의자인 싱어는 쾌락과 고통의 양을 기준으로 고려 방법을 달리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쾌락과 고통의 양을 측정할 객관적인 기준이 없기는 하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고통과 쾌락의 양을 대체적으로나마 측정할 수 있다. 싱어는 이익을 동등하게 고려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평등의 기준을 합당하게 적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익 동등 고려의 원리(The principle of equal consideration of interests)"란 무엇인가? 이를 차근차근 따져 보도록 하자.

(1)이익(interest)
싱어에 따르면 이익이란 "어떤 사람이 욕구하는 모든 것"이다. 공리주의자로서의 싱어는 쾌고 감수 능력을 지니는 존재는 모두 이익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고통이나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이 이익을 가질 수 있는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돌에게는 고려할 아무런 이익이 없다. 돌은 고통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은 당연히 이익을 갖는다.

그에게는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 아닌 동물은 어떠한가? 그들은 고통이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가? 만약 그들에게 쾌고 감수 능력이 있다면 그들은 이익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동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에 싱어는 동물 또한 이익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2)평등
싱어는 우리가 도덕적이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익을 평등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객관적인 입장이란 우리 자신의 호(好), 불호(不好)를 넘어서서 판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윤리적 판단이 객관적인 입장에서 내려지는 판단이라면 단지 나의 이익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이익보다 내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그 사람의 능력, 생김새 등에 따라 이익을 달리 고려해서는 안 될 것이며, 어디에 소속되어 있느냐에 따라 차별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 싱어가 말하는 평등이란 생김새, 능력,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획일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생각하는 평등한 대우란 동일한 고통을 동일하게 파악한다는 것이다.

가령 A라는 사람이 나와 친하다고 하더라도 B라는 사람이 더욱 고통을 받고 있으면 B의 고통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또한 A라는 사람이 잘 생기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못 생기고 능력 없는 B라는 사람이 더욱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B의 고통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A와 B가 동일한 고통을 느끼고 있다면 그들과 나의 친분관계, 생김이나 능력과는 무관하게 양자의 고통을 동등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고통은 느끼는 자의 입장에서의 고통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동일한 세기로 아이와 어른을 때렸을 경우 그것을 느끼는 입장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 때 어른에게는 별다른 아픔이 느껴지지 않아도 아이에게는 매우 큰 아픔을 야기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익 동등 고려의 원리는 인간에게만 적용되는가?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이익을 갖는 존재는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존재들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준으로 따져보았을 때 당연히 동물들도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된다. 싱어는 인간들끼리의 이익 계산을 동물에게도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통은 고통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떤 존재가 느끼는가에 관계없이 고통의 양이 동일하다면 동일한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행복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 행복이란 느끼는 존재의 주관적인 느낌의 문제이다.

따라서 고통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물과 인간 모두에게 관심을 갖는다고 해서 양자를 동일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가령 돼지의 복리를 고려한다고 해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과 동일한 주택이나 식사를 돼지에게 제공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돼지는 그저 적당히 먹을 수 있고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면 만족을 느낄 것이다.

반면, 인간이 돼지가 느끼는 것과 동일한 양의 행복을 느끼려면 단순히 돼지에게 주어지는 혜택으로는 크게 부족할 것이다.

인간은 훨씬 많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적당한 양의 식사와 공간이 주어진 돼지가 느끼는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싱어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평등이라는 기본원리를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확장시켜야 한다고 해서, 그것이 양 집단을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며, 또한 양 집단이 동일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게 해야 하는 지의 여부는 양 집단 구성원이 가지고 있는 본성(nature)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평등이라는 기본 원리는 평등한, 또는 동일한 처우(treatment)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한 원리는 단지 평등하게 고려하길 요구할 따름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존재들을 평등하게 고려한다는 것은 그들을 서로 다르게 처우하며, 또한 그들이 서로 다른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싱어는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종의 이익을 옹호하고, 다른 종의 이익을 배척하는 편견 또는 왜곡된 태도"를 "종차별주의(speciesism)"라고 부른다.

종차별주의는 인간의 각종 태도에서 드러난다. 가령 침팬지와 인간은 유전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거의 같다고 한다. 반면 침팬지와 새우는 이보다 훨씬 큰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침팬지와 새우를 묶어서 동물이라고 부른다.

또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잔인하고 거친 모습을 보여줄 때 "짐승같은" 사람이라 칭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인간 아닌 동물들은 생각 이상으로 "인도적"이다.

가령 육식을 하는 동물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만 동물들을 죽인다. 반면 인간은 단순히 재미 삼아,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몸에 둘러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동물을 죽인다. 인간은 탐욕이나 권세를 얻기 위해 같은 종의 구성원을 살해하기도 한다.

그리고 살해하는 데서 만족하지 않고 고문 등 각종 고통을 가하다가 결국에 가서 잔혹한 방법을 동원하여 죽이기도 한다. 인간 아닌 동물들은 최소한 피식 동물을 괴롭히는 여러 방법을 창안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오히려 인간에게 더욱 잔인한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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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 이론을 받아들여 고통은 나쁘고 쾌락은 좋은 것이라는 데까지 동의한 자들은 그 다음 단계로 과연 동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싱어는 3가지 기준을 제시하고 이와 같은 기준을 통해서 볼 때 동물들은 틀림없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1)행위 방식
행위 방식은 가장 분명하게 동물들이 고통을 느낀다고 주장할 수 있는 증거에 해당한다. 물론 르네 데카르트(Ren Descartes)가 동물들이 자동 기계라고 주장한 바가 있었지만 상식을 가진 사람들 중 동물들이 고통을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우선 인간에 국한해서 따져볼 때 우리 스스로의 고통은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은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스스로가 고통을 느낄 때 나타내는 몸짓을 통해 상대방의 아픔을 추정할 수 있을 따름이다. 철학적인 엄격성과는 별도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의 추정은 완전히 합리적이다.

또한 인간이 고통을 느낄 때 나타내는 몸짓은 인간 아닌 동물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가령 동물들은 아픔을 느낄 때 몸을 뒤튼다든가 안면이 일그러지며 이들이 고통을 못 견뎌 내는 고함소리나 신음소리 등은 인간에서도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모습들이다.

2)신경체계의 유사성
인간과 인간 아닌 동물은 유사한 신경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 아닌 동물은 고통을 느낄 때에 인간과 유사한 신경학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가령 동물들은 긴장상태에서 혈압이 올라가고, 동공이 팽창하며, 땀을 흘리고, 맥박이 빨리 뛴다. 그런데 이처럼 인간과 유사한 반응을 일으키는 신경체계가 주관적으로는 동물들에게 상이한 느낌을 산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합리적이지 못하다.

3)고통의 진화적 유용성
동물들의 신경체계는 우리와 유사한 진화 과정을 거쳤으며, 그들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분명 진화적인 이점이 있었을 것이다. 동물들은 그러한 능력으로 인해 치명적인 상해를 피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일부 사람들은 고통을 느낀다는 분명한 증거가 오직 말을 통해서 확보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오직 언어만이 분명한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감정이나 정서를 표현하는 데에는 얼굴 표정 등의 비언어적 표현 방식이 더욱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또한 사람들은 간혹 거짓말을 하는데 이 때문에 우리는 말이 최선의 증거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외에도 아픔을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말을 못하는 아기들이 있으며 수화를 하지 못하는 말 못하는 장애인이 있는데 우리는 그들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제 동물들이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분명해졌다. 여기서 제기되는 또다른 문제는 고통의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논변이다.

이와 같은 문제는 공리주의 이론이 가지고 있는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가령 두 사람간의 이익이 상충될 때, 또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을 때 양자간의 공리(utility)를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

때문에 레건을 포함한 일부 철학자들은 공리주의 원리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싱어는 정확성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답변을 제시한다. 물론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동물의 이익과 인간의 이익이 상충하는 경우가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양자의 이익을 엄격하게 산출 . 비교하여 그 중 한쪽의 손을 들어주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가령 개와 아기중 택일해야 하는 경우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명백하게, 직관적으로 어느 쪽의 고통이 더 큰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가령, 매우 하찮은 결과를 산출하기 위해 수행되는 실험, 인간의 혓바닥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루어지는 도살, 오락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사냥 등은 분명 동물들이 고통을 겪게 되는 사례이며, 이는 인간이 얻게 되는 이익을 훨씬 능가한다.

또한, 인간의 생존에 불가결하다고 판단되는 실험의 경우는 제쳐놓고라도 화장품 안전성 실험이나 인간의 몸치장을 위한 동물 살육 등은 당연히 제거되어야 한다.

다음으로는, 인간과 인간 아닌 동물의 이익이 진정으로 상치될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살펴보도록 하자. 양자의 이익을 비교하고자 해도 답변을 제시하기 어려운 경우가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가령 들에 곡식을 심어 놓았는데 이를 쥐가 줄기차게 약탈(掠奪)해 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또한 쥐로 인해 전염병이 창궐하는데 쥐를 도덕적인 고려의 대상으로 생각하여 살려둬야 할 것인가?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렇다고 답변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은 어쩐지 우리의 직관에 어긋나는 듯하다. 오히려 쥐를 때려 잡거나 극약을 통해 잡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의무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동물들은 도둑질을 하려는 의도로 농장에 침입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농장에 들어가 농사를 망쳐놓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먹을거리가 있고 그것을 먹으려고 농장에 들어가는 것뿐이다. 전염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인간들이 자신들을 괴롭힌 대가를 주려고 전염병을 퍼뜨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더러운 환경 속에서 생존을 도모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전염병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객관성을 고수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이들 동물에 대해 분노의 감정을 갖는다는 것은 인간 중심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인간 중심적인 태도를 갖는다는 것을 비난만을 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바로 동물의 이익을 능가할 지도 모르는 고통을 인간이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인간에게 해가 되기 때문에 제거하자는 식의 해결은 올바른 방책이라 할 수 없다. 우리는 좀 더 신중하게 그들에게 주게 되는 피해를 최소화하고 우리의 이익을 잃지 않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극약을 준다거나 때려 잡음으로써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것 외에 제3의 선택지가 있을까? 싱어는 동물이 느끼게 될 고통을 최소화하면서 자연스레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방법이 있다고 주장한다.

가령, 약을 먹음으로써 새끼를 낳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한가지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방법은 덫에 걸려 오랜 시간 동안 고통을 느끼면서 죽음에 이르는 경우보다도, 또한 극약을 먹고 고통 속에 숨을 거두게 되는 경우보다도 동물의 이익을 고려해 보았을 때 훨씬 인도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간혹 좁은 우리 속에 갇혀서 사는 동물은 평생 묶여 살았기 때문에 다른 삶을 모르며,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즉 태어나서부터 줄곧 열악한 상황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 속의 동물은 자신의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동물들은 태어나서부터 어떠한 환경에서 살았는가와 무관하게 운동을 하고 싶어하며, 자신들의 몸을 쭉 뻗어보길 바라고, 몸손질 등을 하고 싶어한다.

옥스퍼드 대학의 마리안 도킨스(Marian Dawkins) 박사는 닭을 대상으로 실험을 수행하였는데 닭들은 풀이 깔린 방사장과 새장 중 어느 한가지에 대한 선택권이 주어지자 방사장으로 향했다. 나아가 그들 대부분은 모이가 있는 새장보다도 모이가 없는 방사장을 선호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실험은 닭들이 새장 안에서 불편을 느낀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동물들은 자신들의 생물학적인 본능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환경에서 생활할 때 분명 고통을 느낀다.

고통과 관련한 문제 중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것은 고통이 과연 악이냐는 것이다. 캘리코트는 고통이 악이라는 공리주의 원리를 부정한다.

그에 따르면, 고통은 기본적으로 정보이다. 그것은 신경체계에 스트레스, 흥분, 증상 등을 알려주어 동물이 그것에 적절하게 대응하게끔 해주는 긍정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다리를 심하게 다쳤음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치료를 하지 않다가 죽음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물의 고통은 그 자체 선도 악도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일 뿐이다. 자연이 선이라면 고통도 죽음도 선이다. 이것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세계를 거부하고 생명 자체를 혐오하는 것이다.

물론 고통을 그치게 하라는 정보로 고통을 이해하는 것도 틀린 주장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불필요하게, 이유없이 야기되는 고통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가령, 한 인간을 아무 이유없이 고문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이 때 고문을 당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고통을 느낄 것이다. 여기서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단순히 정보로만 생각해야 하는가? 그리하여 그저 고통은 자연의 이치이니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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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의 논의는 주로 고통 초래의 그릇됨과 관련한 문제였다. 이미 언급했듯이 고통은 고통이다.

따라서 고통을 겪는 존재가 인간이냐 아니냐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고통을 느끼는 자가 갖추고 있는 합리성, 지능 등은 그 존재의 고통을 따져 보려 할 때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죽음은 어떠한가? 인간의 죽음과 인간 아닌 동물의 죽음은 동등한 고려의 대상인가? 그리하여 강아지의 죽음을 인간의 죽음과 동일하게 생각해야 하는가? 싱어는 여기에 대해 부정적으로 답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상상해 보라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정상인들의 생명을 구하거나, 또는 지적인 결함이 있는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아마도 정상인의 목숨을 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정상인과 지적인 결함이 있는 자 둘 중 하나의 고통을 방지하라는 요구를 받게 된다면 - 양자 모두가 아프지만 깊지 않은 상처를 입은 것을 상상해 보라.

그리고 둘 중에 한 명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진통제밖에 없는 상황을 그려보라 - 이 때 우리가 누구를 선택해야 할 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른 종을 고려할 때에도 동일한 논변을 제시할 수 있다.

싱어 생각에는 생명의 가치는 고통과는 달리 그 존재가 가지고 있는 다른 특징들의 영향을 받는다. 만약 사고 능력이 있는 존재의 목숨을 앗아갈 경우 그것은 그 존재의 계획이나 희망 등을 송두리째 빼앗는 격이 된다.

반면, 미래를 계획하거나 장래를 설계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동물들이 죽임을 당할 경우 최소한 자의식이 있는 존재와 같은 손실이 초래되지는 않는다.

때문에 인간과 인간 아닌 동물의 생명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인간의 생명을 택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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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과 식용으로의 사용은 동물들에게 고통을 주는 핵심적인 방법이었다.

그런데 그 중 식용으로의 사용을 중지하게 된다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채식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식물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가? 만약 그들이 고통을 느낀다면 우리는 굶어죽어야 되지 않을까? 만약 굶어 죽기 싫으면 무엇인가를 먹어야 할 것이고, 어차피 고통 산출이 불가피하다면 무엇이든 먹는 것이 정당화되지 않을까?

2)채식을 함으로써 건강이 나빠지는 것은 아닌가? 이 중 두 번째의 문제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채식을 하라는 권고로 들릴 수 있다. 즉 동물들을 도덕적인 고려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채식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채식이 인간의 건강 증진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가치만을 갖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싱어는 채식이 인간의 몸에 좋다는 논변을 그다지 강조하지 않는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도움이 될 경우에만 사람들이 실행에 옮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싱어는 "건강에 좋다"라는 논변마저 제시하면서 채식주의로의 전환을 도모하고 있다.

우선 식물의 고통과 관련한 문제부터 검토해 보기로 하자.
1)식물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가?
싱어에게는 오직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만이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된다. 이에 따라 포유류는 물론이고, 조류, 파충류를 포함해 심지어는 가재나 게등의 갑각류에 이르기까지 모두 도덕적 고려의 대상에 포함시킨다.

한편 동물 중 굴이나 멍게 등과 같이 쾌고감수 능력이 있는 존재인지가 애매한 것들이 있는데 싱어는 {동물해방} 초판에서는 그와 같은 동물들을 먹어도 무방하다고 주장하였으나 최근판에서는 그것들이 쾌고감수 능력이 있을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예 채식만을 하자고 수정 제의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싱어에게는 돌이나 의자 등과 같이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존재는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쾌락을 증진시키고 고통을 제거하라는 공리주의 원리에 입각해서 따져볼 때 아무것도 고려할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식물은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최소한 식물은 살아있는 존재이며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식물이 고통을 느낀다면 싱어와 같은 공리주의자에게는 식물을 먹는 것도 고통을 산출하는 그릇된 행위가 된다.

그리하여 자칫 식물도 먹어선 안되며 결국 굶어죽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극단적인 결론이 도출될 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 이와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리주의 이론이 비상식적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공리주의 이론을 거부하고 동물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적 근거를 송두리째 부정하게 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지금까지의 어떤 실험도 식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입증해 주지 못했다. 간혹 식물이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아직까지 그러한 주장을 결정적으로 지지해 준 실험은 없다.

싱어는 동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의 문제를 검토할 때의 기준, 다시 말해 1)인간과 행위 방식에서의 유사성 2)신경체계의 유사성 3)고통의 진화적 유용성이라는 기준으로 식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를 고찰해 본다.

하지만, 이와 같은 기준으로 볼 때 식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지지해 줄 만한 것은 없다.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고통도 산출하지 않는 식물을 먹어도 무방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미래에 확보될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때 우리는 굶어죽어야 하는가? 설령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고 해도 아마도 식물은 인간 아닌 동물에 비해서 고통을 훨씬 미미하게 느낄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그와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할 필요는 없다. 만약 고통 산출이 불가피하다면 우리는 가급적 적은 고통을 산출하며 생존을 도모해야 할 것이며 이 경우 우리는 동물보다는 식물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식물보다는 동물이 죽게 됨으로써 더 많은 고통이 산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2)채식을 함으로써 건강상의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닌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와 같은 문제는 동물 해방을 옹호하는 핵심적인 논변이 아니다.

싱어가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까지 언급하는 이유는 채식이 건강에 좋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더욱 많은 대중들이 채식을 선택하게 하기 위함이다.

자세한 건강상의 자료를 일일이 제시하지 않더라도 식물이 고기에 포함되어 있는 영양소를 모두 함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리고 채식이 몸에 좋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 연구 결과는 35세에서 64세 사이의 채식주의자의 심장마비 사망률이 동일한 연령 집단의 육식을 하는 일반 미국인의 28%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유방암과 고기 섭취, 그리고 대장암과 고기를 먹는 것이 상관 관계에 놓여 있다는 연구가 발표된 바 있다. 결론적으로 채식을 하게 됨으로써 잃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동물의 해방을 원하는 사람은 안심하고 채식을 생활화하면 되는 것이다.

채식과 관련해 동물들은 서로 잡아먹는데 우리는 왜 동물들을 잡아먹어서는 안되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싱어는 다각도로 그러한 입장을 구분하고 답을 제시한다.

싱어에 따르면 포식동물이 다른 동물들을 잡아 먹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다. 우선 그들에게는 반성할 능력이 없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본능에 따라 동물을 잡아먹을 따름이다.

또한 설령 반성 능력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생물학적인 특성상 채식을 할 수 없으며 만약 채식을 한다면 결국 굶어죽을 수밖에 없다.

싱어는 동물을 따라 육식을 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불신을 눈길을 보낸다. 그는 평상시에는 인간의 존엄성을 외치며 동물의 야만성을 조롱하다가 막상 고기를 먹고 싶으니까 동물을 본받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비판한다.

그리고 나서 싱어는 고기를 먹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의 권위나 자연에 호소하는 논변, 그리고 문제를 회피하면서 동물을 먹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입장에 차례대로 비판을 가한다.

우선 신에의 호소는 오늘날에 와서는 더 이상 정당한 논변이 되기가 어렵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신의 존재 및 신의 명령을 믿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으며, 설령 신이 명령을 내렸다고 하더라도 그 명령에 대한 도덕적인 정당성은 여전히 검토의 대상이 된다.

다음으로 자연에 호소하는 자들은 다윈이 말하는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서 인간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이에 대해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설령 자연스러운 것들 중 많은 것들을 따라야 한다고 해도 우리가 따라서는 안되는 자연스러운 성향들이 있다는 점이다.

가령 전쟁에의 성향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남자에게 강간에의 욕구는 자연스런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성향을 무턱대고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과 가치의 문제는 별개로 무어(G. E. Moore)는 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오류를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불렀다. 물론 여기에서 육식이 자연스러운 성향이며 이를 따라도 무방한 성향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자 할 때 우리는 어떠한 도덕적인 기준을 통하여 그와 같은 자연스런 성향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회피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우리는 우선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노력해야 하며 그리고 난 후 올바른 판단 능력을 동원해 육식의 정당성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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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논변을 비판하는 자들 중에는 동물을 도덕적인 고려의 대상으로 삼아야 함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문제가 더욱 시급한 과제이기 때문에 동물의 문제를 뒷전으로 미뤄 놓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에 따르면 인류에게는 성차별, 인종차별, 빈곤, 기아, 실업, 환경 등 각종 문제가 산적되어 있다.

이와 관련해 리차드 니우하우스(Richard Neuhaus)는 동물의 권리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기아나 성차별 등 인간의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자들은 인간보다 인간 아닌 동물들에 더욱 관심을 갖는 자들이라고 비판을 가한다.

싱어 생각에는 이와 같은 지적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만약 양자택일의 문제라면 우리는 설령 동물들이 고통 속에 허덕이고 있더라도 유사한 고통 속에 놓여 있는 인간을 우선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동물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다시 말해 동물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고 해서 인간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동물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반드시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행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싱어에 따르면 그저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동물을 도덕적으로 고려한 것이다. 가령 진정으로 동물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식사시간에 육식을 피하면 된다.

또한 모피 옷이나 가죽 구두를 신는 대신 다른 제품을 사용하기만 하면 된다. 물론 이와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이 적극적으로 동물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싱어에게는 이와 같은 삶이야말로 인간에게 별다른 손해를 주지 않으면서 동물을 해방하는 훌륭한 방법이다.

한편, 우리는 인간 문제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송아지가 1파운드의 단백질을 생산하기 위해 먹는 단백질은 무려 21파운드이다.

즉 우리가 되돌려 받는 양은 투입한 양의 5% 미만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같은 자원 낭비는 비단 단백질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칼로리를 따져 보나 기타 여러 영양소의 산출량을 따져보아도 동물을 통한 생산은 분명 자원 낭비이다.

또, 다른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인들이 1년에 10%만 고기 소비를 줄여도 이를 통해 6000만 인구가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적절히 배분되기만 한다면 우리가 육식을 어느 정도만 줄여도 이 세상의 기아와 영양실조를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육식을 즐김으로써 우리는 사실상 이 세상의 기아 문제를 오히려 악화시키고 있다.

육류 생산은 비단 식량 사정만을 악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는 물, 화석에너지, 부식토 등 여러 자원을 낭비함으로써 생활 환경에 악영향을 초래하기도 한다. 여기서 물과 관련한 사례만을 간단히 언급한다면 미국에서 소비되는 절반 이상의 물이 가축에게 사용된다고 한다.

또한, 동물 생산품에 대한 수요로 인해 미국, 호주, 그리고 그 외 국가의 수많은 건조 지역에서의 지하수가 고갈되어 가고 있으며 농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폐기물로 인해 수자원이 크게 오염되고 있다.

이외에도, 열대우림이 심각하게 파괴되고 있는데, 산림은 식용 가축을 방목하기 위해 개척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산림 개발로 인해 제3세계의 빈민층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않고 육식을 즐기는 북미 사람들에게 고기를 공급하기 위해 개발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파괴는 그 파급 효과가 매우 큰데 가령 이와 같은 파괴로 인해 수많은 생물 종들이 멸종하게 되며, 땅의 침식, 강우량 감소, 온실 효과 등으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가 우리에게 되돌아오게 된다.

이상을 요약하자면 인간의 생존과 결부되는 환경 문제나 식량 문제는 오히려 우리가 육식을 피함으로써 어느 정도 해결을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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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에 대한 서구의 태도는 유대주의와 고대 그리스 두 가지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기독교로 흡수 통합된다.

기독교에서는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강조하며, 동물은 인간의 수단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세계관하에서는 동물이 도덕적 고려의 대상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편 교회의 영향을 어느 정도 벗어난 시기부터 동물들을 새롭게 보고자 하는 시각이 나타나는데 그러한 시각도 여전히 인간 중심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가령, 르네상스기에는 신중심적인 우주관에서 벗어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힘과 가치, 그리고 품위등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인간이 지위가 강조될수록 상대적으로 다른 존재들의 지위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싱어는 동물에 대한 도덕적 고려라는 측면에서 볼 때 르네상스기는 다음과 같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중세 스콜라주의를 반대하는 인본주의 사상의 부흥과 더불어 르네상스기(期)에는 중세적인 우주관이 분쇄되고 인간의 다른 동물에 대한 태도가 근본적으로 변혁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르네상스의 인본주의는 결국 인간 중심적인 주의(主義)(humanism)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용어는 인도적인 행동을 지향하는 인도주의(humanitarianism)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후 수 백년이 흘러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되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지위를 부정한다. 이와 더불어 인간과 인간 아닌 동물간에 질적인 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은 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며, 인간 스스로가 바로 동물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결론이 명백한 과학적 사실로 밝혀지고 있음에도 다윈 이론이 함축하고 있는 바는 그다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 못한 듯하다.

오히려 오늘날은 동물 실험, 공장식 동물 사육 등을 통하여 사상 유래 없는 동물 탄압이 자행되고 있다. 왜 이와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가?

싱어에 따르면 우리가 갖는 동물에 대한 과거의 태도는 그 뿌리가 너무 깊다. 여기에 그 뿌리를 강화시켜 주는 사회적 . 문화적 여건이 조성되어 있다.

때문에 어떤 새로운 지식을 통해 인간과 인간 아닌 동물의 간격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어도 근본적인 혁신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고기가 어떻게 생산된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바가 없이 어릴 때부터 고기를 먹는다. 그런데 한 번 고기를 먹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입맛을 들이게 된 후에는 설령 고기를 먹는 것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도 육식을 그만두기가 어렵게 된다.

또한, 일상인들은 육식이나 동물 실험을 윤리적 검토의 대상으로 삼아 보려고 하지 않으며,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도덕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마저도 대개 인간 아닌 존재들은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가 먹는 가축들은 더욱 천시의 대상이며 그들의 삶은 왜곡되어 우리에게 알려진다. 가령 우리가 쓰는 욕을 생각해 보라. 거기에는 가축들의 이름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이 있다.

또한,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은 대부분 소나 돼지 등의 가축보다는 곰이나 사자같은 야생동물이다. TV에서의 동물 관련 프로그램은 야생동물 이야기로 채워진다. 아이들이 보는 그림책도 가축들의 삶을 체계적으로 오도한다.

책에는 가축들이 대부분 평화롭게 풀을 뜯거나 널따란 들판을 어슬렁거리며 돌아 다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물론 사실이 아니다.

신문에 실리는 동물 기사도 희귀동물이나 동물원에서 새로 탄생한 새끼를 간단하게 언급할 뿐 인간으로 인해 고통받는 동물들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가축이나 실험용 동물들의 고통은 각종 방법을 통하여(그것이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건 간에) 철저하게 우리의 관심에서 소외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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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은 응당 받아야 할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싱어는 동물의 문제가 어떤 윤리적 함축을 갖는지를 빈틈없이 설명하고 있는데 만약 그의 논리를 수긍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동물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될 것이다.

설령, 싱어와 같이 공리주의자가 아니라서 그의 원리, 다시 말해 이익 동등 고려의 원리를 일일이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해도 동물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은 우리들의 최소한의 의무라 할 수 있다.

현재 인간 아닌 동물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문제는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하지 못했던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할 점은 설령 공리주의자가 아니라도 최소한 동물이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라는 점에는 누구나가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동물의 도덕적 지위를 부정하는 폭스(M. A. Fox)마저도 인간들이 동물들을 부당하게 대우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싱어와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포즈만(L. P. Pojman)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제, 실질적으로 모든 사람이 단지 흥미삼아 포유류나 조류를 고문하거나 죽이는 것이 잘못이라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

그들에게 문제는 그러한 동물들이 도덕적인 지위를 갖느냐가 아니고, 그들이 왜, 그리고 얼마만큼 그러한 지위를 갖느냐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굳이 동물들과의 차별성을 나타내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이행함으로써만 우리가 평상시에 강조해 왔던 인간 아닌 동물들과의 차이를 분명히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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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방송대학교 이필렬 교수님께서 ‘창작과 비평’ 2000년 봄호에 실으신 것입니다.)

내가 급진적 동물실험 반대론자들을 미심쩍게 보기를 그친 것은 수년 전 독일의 근본생태주의자 루돌프 바로(Rudolf Bahro)에 관한 글을 읽고서였다.

바로는 1985년 녹색당이 동물실험에 대해 보여준 미지근한 태도(동물실험의 엄격한 규제)에 환멸을 느껴 당을 떠났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타협적 태도가 인간이 모든 생물종의 중심이고 따라서 다른 종에 대한 인간의 폭력은 정당하다는 생각을 강화할 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인간이 과학기술이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자연을 조작하고 고문하는 것에 대해 비판해왔지만, 동물실험을 완전히 금지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선뜻 동의할 수가 없었다.

서양 사람들이 애완동물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것을 곱지않은 눈으로 보아왔던 나는 동물실험 반대자들도 대안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그 연장선 위에서 감정적으로 그러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버릴 수 없었고, 또 한편으로는 그러면 어떻게 유해물질을 판별할 수 있고 새로 개발한 의약품의 부작용을 알아낼 수 있는가 하는 “인간중심적”인 생각에서도 빠져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의 행동은 동물실험이야말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오만한 태도, 반생명적 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임을 깨우쳐주었던 것이다.

이제 동물실험 반대자들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졌으니 그들의 논의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갖추어진 셈인데, 이번에도 뒷덜미를 잡는 것이 있었다.

동물실험을 반대하는 이론가이자 실천가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여기서 평하는 책의 저자 피터 싱어(Peter Singer)이니 먼저 그의 논지를 알아보는 것이 순서겠지만, 그가 중증 장애아의 안락사나 유전적 결함을 지닌 태아의 낙태를 찬성하고 반면에 유인원에게는 인권에 준하는 권리를 주자는 운동을 벌이고 다닌다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싱어는 오스트리아계 유태인의 후손이고 조부모 셋이 나치 집단수용소에서 살해당했지만, 독일에서 그는 장애아 안락사를 찬성하는 인물이라는 딱지가 붙어 어디에 가나 학생과 시민들의 극렬한 항의공세를 받아야만 했다.

제3제국 때의 안락사를 통한 장애아 제거라는 끔찍한 역사를 가진 독일인들이 그처럼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 나의 경우도 장애아를 동물보다 못한 것처럼 취급하는 싱어의 입장은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최근에 동물의 권리를 논하는 책이 한국어로 처음 번역출판되었고 (그것은 당연히 피터 싱어의 책일 터인데), 또 이에 대해 평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기에 우선 알아는 보자라는 마음으로 “동물해방의 성서”라는 꼬리표가 붙은 <동물 해방>(Animal Liberation)을 읽게 되었다.

싱어는 먼저 윤리학자로서 동물이 인간과 평등하게 취급되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그것은 고등동물도 인간과 똑같이 고통을 느낄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동물의 고통도 인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가능한 한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그는 인간이 동물실험을 통해 동물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만드는지를 심리학, 의학, 독물학 분야의 풍부한 예를 가지고 설명한다.

현대의 공장식 가축농장은 동물실험의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은 동물에게 고통을 가하는데, 싱어는 이에 대해서도 다양한 자료를 사용하여 인간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동물을 얼마나 잔혹하게 다루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다음 단계는 그러면 동물해방을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일 것이다.

싱어는 가장 효과적인 행동으로 채식주의자가 될 것을 권유한다.

채식은 공장식 가축생산에 대한 강력한 불매운동이고, 인간은 채식을 통해서도 필요한 영양소를 얼마든지 섭취할 수 있으니 채식이 동물해방을 위한 힘있는 무기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싱어는 동물에 대한 차별, 즉 종차별주의의 역사와 현재의 논의를 소개하고 이에 대해 동물해방론자로서의 답변을 제시한다.

책을 다 읽고나서 나도 이제는 좀더 철저한 채식주의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싱어의 논변은 대단히 훌륭한 편이라 해야겠다.

그렇기는 해도 내 가슴 한쪽에는 석연찮은 무엇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싱어는 동물실험과 공장식 농장에 대해서 종종 분개한 듯한 어조로 이야기하긴 하지만 그의 일관된 주장은 동물과 인간이 평등하다는 데 대한 이성적인 성찰만이 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것이다.

그는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가 경험했던 자연과의 합일을 통한 희열도 “이성적 성찰이 결여될 경우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본다(335면).

그럴 경우 동물과 바위, 동물과 나무 사이의 차이를 잊게 될 수 있고, 그 결과 동물과 식물을 죽이는 것에 차이를 두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디언과 같이 자신이 자연의 일부이고 야수들의 혈연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던 “고매한 야만인”의 감정도 동물해방을 위해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342).

그의 논지에 따르면 박희병 교수가 소개하는 이규보 같은 선인들의 생태사상도 파리나 모기를 척추동물 - 고통을 더 많이 느끼는 - 과 동등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쓸모 없는 것이 된다.

싱어는 동물해방을 위해 감정에 호소하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고 보지만, 신비적인 경험이나 영성이 들어갈 자리는 남겨두지 않는다.

그리고 동물실험을 대신할 과학적 방법이 얼마든지 개발될 수 있고, 동물의 고통도 과학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현대과학도 대체로 수용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가 그토록 역설하는 동물해방이란 것도 궁극적으로는 공리주의라는 이성의 산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현대 과학기술 위에 올라탄 인간에 의해 짓밟히고 잘려나가는 자연을 보며 가슴 깊이 아파하는 사람들의 “성스러운” 행동 (예를들어 인도 북부에서 벌채에 대항해 나무를 껴안...)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성적 논의를 따라가면, 유전적 결함을 지닌 태아보다 갓태어난 건강한 송아지가 더 큰 고통을 느끼고 태아에게는 출생후 고통만이 남아 있지만 송아지는 남은 생애를 즐겁게 보낼 수 있기 때문에, 태아는 안락사시키고 송아지는 해방하는 것이 더 타당하게 보일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논리상으로는 흠잡을 데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논리로 어찌해볼 수 없는 무엇이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말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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