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84 오늘방문자수 : 704 / 전체방문자수 : 38,937,571
 
 
 
공지게시판
채식뉴스(News)
가입인사
질문과답(Q&A)
잦은문답(FAQ)
자유게시판
전국채식식당,제품,서적
블로그(채식요리)
블로그(채식식당)
블로그(채식제품)
블로그(채식일기)
채식급식
유명채식인
동영상TV(생명존중)
동영상TV(건강과식품)
동영상TV(환경생태)
동영상TV(명상종교)
동영상TV(일반종합)
동영상TV(유명채식인)
동영상TV(음악)
동영상TV(요리)
동영상TV(애니메이션)
동영상TV(English)
영문자료(English)
만화그림
첨부하기
후원하기
채식은 작고 가난한 정신, 프란체스코
한채연 2010-04-22 11:06:45


(다음은 프란체스코라는 닉네임을 가지신 분이 올려주신 글입니다.)

채식은 작고 가난한 정신

채식은 단순히 고기를 먹지 않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또한 채소만을 먹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않는가 하는 것은 채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채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채식의 정신입니다. 그것이 불씨가 되어 채식이라는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채식의 정신은 무엇보다도 작고 가난한 정신입니다. 채식은 곧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작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 아프간의 가난한 이들, 아사 직전의 아프리카 사람들, 우리 주변을 맴도는 떠돌이 부랑인들, 밥을 굶은 아이들, 밥을 굶는 노인들… 그리고 현재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있었던 그런 사람들, 또한 미래에도 있을 그런 사람들… 그들 앞에서 차마 고기를 먹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채식의 정신은 차마 고기를 먹을 수 없을 뿐더러, 채식조차 마음껏 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육식은 안 하지만 채식은 배부르게 마음껏 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전부는 아닙니다. 채식의 정신은 채식조차 마음껏 할 수 없을 뿐더러, 맛나게 요리를 해서 먹을 수도 없는 마음입니다. 적게는 먹지만 대신 한껏 맛을 내 먹는다면 그것 또한 부끄러운 일입니다. 굷주리는 이들을 생각하면 음식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을 만큼만 먹는데 만족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마땅한 자세입니다.

물론 우리는 배부르게 많이 먹고 싶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기도 합니다. 그런 욕구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오히려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현실은 그런 욕구에 그대로 순응하며 살기에는 너무도 비참합니다. 그저 즐기며 살기에는 이 세상의 고통이 너무도 거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난한 식사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난한 식사를 해야 된다 해서 하기 이전에, 할 수 밖에 없는 내적인 울림이 있기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식사가 우리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지는 않을까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발적인 가난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오히려 살 맛을 느끼게 만듭니다. 혀로 느끼는 맛이 아닌 영혼으로 느끼는 맛 말입니다. 또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이러한 작은 실천은 우리 마음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 줍니다. 이러한 선물은 부유한 식사를 통해서는 결코 주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제레미 리프킨은 '쇠고기를 넘어서'라는 글에서 개인의 건강을 위해서든, 지구 생태계의 보전을 위해서든, 제3세계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해서든, 동물학대를 막기 위해서든 쇠고기 문화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 글의 동물학대와 관련된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글을 시작합니다

'세계 축산업의 최종적인 희생자는 동물들 자신들이다."

저는 이 글을 읽은 이후 지금까지, 이 문장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문장은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것들을 일깨워 주며, 너무도 소중한 것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세상을 직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분석적인 안목도 필요하나, 역시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 근본을 꿰뚫을 수 있는 것은 단박에 정곡을 찌르는 직관적 안목입니다. 리프킨의 '최종적 희생자'라는 말은 우리가 문제를 직관적으로 보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 모두가 축삼업의 희생자이며, 이 세상 모두가 축산업의 희생자이지만, '최종적' 희생자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동물들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이유로든 채식을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개인의 건강을 위해서든, 지구 생태계의 보전을 위해서든, 제3세계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해서든, 동물학대를 막기 위해서든, 어떠한 이유에서든.

우리는 이중 어느 한 가지 이유로 채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이유로 채식을 할 수 있으며,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 모든 이유로 채식을 합니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동기가 없고, 이 각각의 동기들이 결국은 한 몸임을 역시 많은 이들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특별히 그 중 동물학대를 막기 위해 하는 채식에 대해 말하자면, 이는 학교로 말하면, 유치원 내지 초등학교에 해당된다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주 기초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벌레를 죽이지 않으려는 마음이며, 꽃을 꺽지 않는 마음도 그런 마음입니다.

동물학대를 막기 위해 하는 채식은 아주 단순한 마음입니다. 굳이 복잡한 설명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그리 고급스러워 보이지는 않을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기초가 안 닦여 있으면, 다른 어떤 동기에서 하는 채식도 모래 위의 성처럼 한 순간에 허망하게 무너져 내릴 수가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에 있습니다. 살고자 하는 생명을 살리고 싶어하는 마음은 우리의 인성을 결정짓는데 있어 아주 핵심적이고 근원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신의 마음이라고도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만큼 원초적이고 숭고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동물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들의 고통 때문일 것입니다. 채식 역시 고통 받는 동물에 대한 인간 측의 응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 의한 동물의 고통은 그 크기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 고통을 다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동물 운동가 조차도 그 크기를 다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동물의 고통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코끼리의 다리나 코 끝을 만지고 있는 장님에 지나지 않을는지 모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동물 문제의 핵심을 이룹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알려진 동물의 고통들 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동물의 무수한 고통들이 우리 앞에 아직 그 정체조차 드러내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힘겨워 함을 넘어서 절망하고 좌절하게 되며, 종국에는 다음과 같은 점을 깨닫게 됩니다.

즉, 우리는 동물 문제를 1+1=2 와 같은 사고 방식으로는 해결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는 덧셈을 해 나갈 수 있고, 어느 정도까지는 논리적으로 접근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이 모든 노력이 허망할 것입니다. 그만큼 동물의 고통은 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논리적, 이성적 접근을 무색하게 할 만큼 거대합니다.

우리를 결정적으로 채식에로 돌아서게 만드는 그 무엇은 어떠한 강렬한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이 깨달음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선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내면의 본래적 감수성과 세상의 고통이 동시(同時)에 만나는 순간에 가능한 것입니다.

새가 알을 까고 나오기 위해서는 어미와 새끼가 알의 껍질을 동시에 쪼아야 한다고 합니다. 어느 한 쪽만이 쪼아서는 알이 깨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미와 새끼 모두 서로의 부리가 언제 맞닿을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서로가 혼신의 힘을 다할 뿐입니다. 그러니 그 부리가 서로 맞닿아 알이 깨짐은 엄청난 행운이요 선물입니다.

새끼 새는 알 속에서 암흑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알이 깨지는 순간 새끼 새에게 천지는 개벽 됩니다. 우리는 새가 알을 깨고 나오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에 대해서는 설명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알이 깨지는 그 순간의 새끼 새 자체의 체험은 설명을 할 길이 없습니다. 새끼 새의 체험은 어떠한 설명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신성한 것이기에, 세상이 아무리 험악하게 돌아가도 그 영역은 절대로 손상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를 채식에로 이끄는 깨달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 깨달음의 순간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체험은 언어의 영역을 넘어서 있을 만큼 숭고한 것이고, 따라서 손상받지 않으며 언제나 진실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무엇 무엇은 먹고 무엇 무엇은 먹지 않기 위해서 채식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채식을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기쁨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눈물과 통회에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사랑인 이유로 곧 눈물과 통회인 것입니다.

채식은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마음 아파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사랑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슬퍼하는 마음이 그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말은 자비(慈悲)라는 말과 뜻이 같은 말이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슬퍼하는 마음이 사랑이라는 하나의 마음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이 고통받는 데 대해서도 마음 아파하지만, 그들이 소외받고 있다는 데 대해서도 마음 아파합니다. 우리는 소외받는다는 것이 우리 자신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잘 압니다.

우리는 소외받을 때 안으로부터 서서히 죽어 갑니다. 그러니 누군가 소외받고 있다면 그에게 사랑을 주고 싶고, 또한 그로 하여금 사랑을 느끼게 해 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살리고 싶어하는 것입

니다. 그것은 내가 원하기 이전에 내 안에 있는 사랑이 원하는 것이고, 마음이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채식을 함으로써 우리 삶의 중심을 이동하게 됩니다. 나에게서 남에게로. 또는 내가 있음에서 내가 없음으로...

우리는 채식을 함으로써 자긍심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더 깊이 내려가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소외를 체험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이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채식을 함으로써 단지 기뻐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아직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러한 채식은 고통받고 소외받는 이들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채식입니다.

우리 자신이 일상 속에서, 그들과의 깊은 일치감 속에 심연으로부터 그들과 같은 소외 체험을 할 수 있을 때 그 채식은 고통받고 소외받는 이들과 직접 만나는 채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뻐하는 나마저 사라지고 그들 옆에서 그들과 함께 소외받는 동료로 존재할 때 진정한 기쁨도 찾아 올 것입니다.

http://blog.naver.com/lwb22028/50173361206

370.jpg (12Kb)
IP Address : 121.131.174.162 

서울 마포구 대흥동 22-79번지 302호 한국채식연합 전화번호: (02)707-3590 이메일주소: LWB22028@daum.net 카카오톡아이디:333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