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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주재현
한채연 2011-03-04 22:35:47


서명: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 육식주의를 해부한다
(Why we love dogs, eat pigs, and wear cows: an introduction to carnism)

저자: 멜라니 조이(Melanie Joy)
역자: 노순옥
출판사: 모멘토, 2011.

저자소개: 사회심리학자. 보스턴의 매사추세츠 대학 교수.

차례:

제1장

사랑할까 먹을까
개를 먹는 게 왜 문제인가
사라진 연결고리
공감에서 무감으로

제2장

육식주의: “원래 그런 거야”
육식주의
육식주의, 이데올로기, 현상유지
육식주의, 이데올로기, 폭력
제3장 ‘진짜’ 현실은 어떤가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나쁜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마라
돼지의 진실
쇠고기는 어디에서 오나
닭과 칠면조-새대가리라고?
알 낳는 닭-생산 또 생산
젖소-짜고 또 짜고
송아지-‘쓸모없는 부산물’의 운명
물고기 등 해양동물-식품인가 생명인가
주저앉는 동물-죽음의 문턱에 서다
도축장 벽이 유리라면

제4장

부수적 피해: 육식주의의 또 다른 희생자들
우리는 얼마나 안전한가?
도축장의 인간 동물
우리 행성, 우리 자신

제5장

육류의 신화: 육식주의를 정당화하기
정당화의 세 가지 N
신화를 만드는 사람들
공식적인 승인-합법화
육식은 정상적이다
육식은 자연스럽다
육식은 필요하다
자유의지라는 신화

제6장

육식주의의 거울 속으로: 내면화된 육식주의
인식의 트리오
대상화-동물을 물건으로 본다
몰개성화-동물을 추상적으로 본다
이분화-동물을 범주로 가른다
기술은 왜곡하고 격리한다
동일시와 공감과 혐오감
매트릭스 안의 매트릭스-육식주의의 스키마
출구는 여기다-육식주의 매트릭스의 허점

제7장

바로 보고 증언하기: 육식주의에서 공감으로
마음으로 본다-증언의 힘
무감에서 공감으로
증언에 대한 저항감
시대정신 바로 보기
증언의 실천-무엇을 할 수 있나
육식주의 너머로
증언하는 용기를


내용요약:

제1장 사랑할까 먹을까

우리가 쇠고기와 개고기에 대해 완연히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바로 ‘인식’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종류의 고기에 대해 상이한 반응을 보이는 까닭은 그것들 간에 실질적인 차이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달리 인식하기 때문이다.

개를 먹는 게 왜 문제인가

우리가 쇠고기와 개고기를 그토록 다르게 보는 이유의 하나는 소와 개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판이하다는 데 있다. 우리가 개를 사랑하면서 소를 먹는 것은 개와 소가 근본적으로 달라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식에서의 이런 차이점들은 우리의 schema 때문이다. 스키마란 우리의 신념과 생각, 인식, 경험을 구조화하는 심리적 틀을 이른다. 스키마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자동적으로 정리하고 해석한다. 일반화는 스키마가 자기 고유의 기능을 해낸 결과다. 우리는 동물을 포함한 모든 대상에 관해 스키마를 갖고 있다.

우리는 동물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분류하는 스키마를 갖고 있다. 특정 동물에 대한 우리의 느낌과 그들을 대하는 방식은 그게 어떤 동물인가보다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어떠한가에 더 달려있다.

맛에 대한 우리의 취향 대부분이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동물성 식품은 매우 상징적이며, 이 상징성은 전통에 의해 더욱 강화되면서 우리의 식품 기호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동물성 식품에 관한 한, 모든 미각은 후천적으로 습득됐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라진 연결고리

먹을 수 있는 종에 관한 우리의 인식과정에는 설명되지 않은 단절, 사라진 연결 고리가 있다. 고기와 그것을 제공한 동물을 연결시키지 못한다는 얘기다. 먹을 수 있다고 간주하는 극소수의 동물을 먹는 일에 우리는 왜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걸까? 혐오감의 부재는 상당 부분 학습 때문이다. 한데 혐오감의 근저에는 우리의 자아의식에 훨씬 더 긴요한 감정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공감이다.

공감에서 무감으로

우리가 동물들의 불필요한 고통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계속 먹는 한, 스키마는 동물과 그 고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왜곡해 그것을 편안히 섭취하도록 해줄 것이다. 고기에 대한 우리의 스키마를 형성하는 신념체계가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수단들을 제공한다.

가장 중요한 도구는 ‘정신적 마비’다. 정신적 마비에는 방어기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심적 메커니즘이 복합적으로 동원된다. 이들 메커니즘은 광범하고 막강하며 눈에 안 보일 뿐 아니라, 개인 심리를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도 작동한다.

이것들이 우리의 인식을 왜곡하고, 감정으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으며, 공감을 무감각으로 바꿔 버린다. 동물을 고기로, 고기를 음식으로 바꾸는 시스템의 주된 방어 수단은 비가시성이다. 비가시성은 회피와 부정이라는 방어기제를 반영한다.

제2장 육식주의: “원래 그런거야”

개를 생각할 때는 ‘귀엽다’, ‘충성스럽다’는 생각을 하지만, 돼지를 상상했을 때는 ‘진창’, ‘땀’, ‘더럽다’ 같은 말을 떠올린다. 왜 우리는 돼지는 먹고 개는 먹지 않을까? 에 대한 대답으로 대부분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이유를 댄다.

우리가 돼지를 먹고 개는 사랑하면서 왜 그렇게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부조리한 일이다. 이 문제에 관해 하나같이 사고의 기능을 유보하고 ‘자기들이 그런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은 바로 육식주의 때문이다.

육식주의

산업화한 세계의 대부분에서 육식은 불가피한 일이 아니라 선택이다. 생존은 물론이고 건강에도 고기는 필수적이 아니다. 우리가 동물을 먹는 것은 단지 늘 그래 왔기 때문이며, 그 맛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동물이란 먹도록 되어 있는 게 아니냐, 즉 ‘원래 그런 것’ 아니냐고 생각하면서 먹는다. 아무런 자의식 없이, 왜 그러는지 이유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고기를 먹는다. 그 행위의 근저에 있는 신념체계가 우리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이 신념체계를 나는 ‘육식주의(carnism)' 라고 부른다.

육식주의는 특정 동물들을 먹는 일이 윤리적이며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신념체계다. 육식주의자는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택에 따라 고기를 먹는데, 선택은 항상 신념에서 비롯된다. 선택임에도 선택이 아닌 듯이 보이는 것은 육식주의의 비가시성 때문이다. 그런데 왜 육식주의는 눈에 드러나지 않는건가? 바로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육식주의는 정밀한 검토를 잘 허용하지 않는 형태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육식주의, 이데올로기, 현상 유지

이데올로기란 공유된 신념들이자 그 신념을 반영하는 실천이다. 우리가 보통 또는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수의 신념과 행동양식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이르는 바 주류라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다른 이름-지극히 광범하게 퍼지고 확고히 자리잡아서 그 가정과 관행들이 상식으로 여겨지는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 다른 방식-일 뿐이다.

그것은 의견이 아니라 사실로 간주되고, 그 관행은 선택되는 게 아니라 주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즉 규범이며, ‘원래 그런 것’이다. 육식주의가 지금까지 이름을 얻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데올로기가 확고히 자리 잡았을 때는 눈에 보이지 않게 마련이다.

주류에서 벗어난 이데올로기들은 알아보기가 더 쉽기 때문에 채식주의가 육식주의보다 먼저 이름을 얻은 것이다. 육식의 이데올로기가 이름을 얻은 것은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름이 붙은 지 무척이나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에 와서야이다. 확고히 들어선 이데올로기가 그 상태를 유지하는 주된 방법은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남아 있는 주된 방법은 이름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면 의문이나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으므로.

육식주의, 이데올로기, 폭력

육식주의 이데올로기는 ‘폭력적 이데올로기’이다. 이 시스템에서 폭력을 제거한다면 시스템은 사라질 것이다. 도살 없이는 고기를 생산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동물이 고통 받는 것을 보기 싫어한다. 감각이 있는 다른 존재와 공감하기 때문이다. 폭력적 이데올로기는 물리적인 비가시성에도 의존한다. 그들의 폭력은 사람들의 시야에서 잘 감춰져 있는 것이다.

제3장 ‘진짜’ 현실은 어떤가

평균적인 미국인은 대략 1년에 먹는 고기가 100kg을 넘는다. 미국 축산업계에선 한 해에 100억 마리의 동물을 도살한다. 식육은 엄청나게 거대한 산업이다. 눈길 가는 데마다 육류가 없는 곳이 없다.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먹는 동물의 거의 전부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철저하게 우리에 갇혀 질병에 시달리고 극심한 추위나 더위에 노출되며, 비좁아 터진 공간에서 거칠게 다루어지고 심지어 정신 질환이 생기기도 한다. 오늘날 가축은 도축장에 실려 갈 때까지 거대한 ‘동물밀집사육시설’에 갇혀 산다. 공장식 축산농장의 목적은, 최소의 비용으로 제품을 생산하여 가능한 최대의 수익을 남기는 것이다.

나쁜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마라

비가시성은 육식주의 시스템의 보루다. 상징적 비가시성은 방어기제인 ‘회피’에 의해 가능해진다. 회피는 부정의 한 형태다. 문제의 시스템에 이름 붙이기를 피할 때 우리는 진실을 피할 수 있으며, 그러다 보면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게 된다.

식탁에 오르는 육류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기구들은 사실상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 시스템도 희생자가 대중에게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일을 막아야 한다. 대중이 시스템에 대해, 또는 자신들의 시스템 참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도록 말이다.

돼지의 진실

대부분의 돼지들은 전 생애를 밀집사육시설에 갇혀 지내면서 도축장행 트럭에 오를 때까지 한 번도 바깥 구경을 못한다. 새끼 돼지들은 태어나자마자 마취도 없이 거세되고 꼬리가 잘린다. 사육장 환경 속에서 동물들은 문자 그대로 미쳐가는 것이다.

갇힌 채 태어난 새끼 돼지들은 2주나 3주 동안만 어미의 젖을 먹을 수 있다. 그나마 어미와 분리된 채 우리의 창살 사이로 젖을 빤다. 젖을 뗀 후 6개월 동안 어린 돼지들은 돼지공장의 더러운 우리나 축사에 쑤셔 넣어진다.

돼지가 도살하기 알맞게 자라면 도축장행 트럭에 오르게 된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수를 트럭에 우겨 넣는데, 과밀적재에다 최고 28시간이나 걸리는 수송 과정에서 음식과 물을 주지 않는 것은 물론 극도의 열기나 냉기로부터 전혀 보호되지 않기 때문에 사망률이 높다. 그 여정에서 살아남은 돼지들은 도살될 때까지 대기용 우리에 넣어진다.

그러다 시간이 되면 전기봉을 든 일꾼들의 재촉을 받으며 ‘슈트’라고 부르는 좁은 통로를 따라 한 줄로 도살 라인을 향해 간다. 원칙적으로 가축들은 도살되기 전에 기절시켜 의식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높이 설치된 컨베이어 벨트의 족쇄에 발목이 걸린 채 거꾸로 매달려 가는 돼지들 중에는 아직 의식이 멀쩡한 것도 있다.

적잖은 돼지가 의식이 남은 상태로 다음 공정을 맞기도 한다. 털을 뽑기 위해 끓은 물에 넣어지는 것이다. 번식용으로 쓰이는 암퇘지들도 결국은 도축장으로 끌려간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임신용 우리라고 불리는, 금속창살로 엮은 작은 우리 혹은 그런 창살로 좁게 칸막이를 한 축사에서 보낸다. 이렇게 갇혀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암퇘지는 5-6개월이라는 짧은 주기로 강제된 임신을 거듭하다가 더 이상 새끼를 낳을 수 없게 되면 도축장행 트럭에 실린다.

쇠고기는 어디에서 오나

쇠고기 업계에선 태어나서 6개월까지의 송아지를 방목한다. 목초지를 갖고 있는 개별 목장주들과 계약을 해 이 과정을 맡기는데, 그러는 편이 더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태어난 송아지는 거세, 낙인과 제각(뿔 없애기)을 모두 마취없이 한다.

6개월 됐을 때 어미젖을 떼면서 송아지는 두 번째 외상을 겪는다. 젖떼기는 가장 큰 심리적 스트레스 요인이다. 젖을 뗀 후 예비 우리에서 두어 달을 지낸다. 거기서 송아지들은 갇혀 있는 생활과 여물통에서 먹이를 먹는 일에 익숙해지고 자연의 것이 아닌 먹이에 길이 들어야 한다.

나머지 생애는 비육장(고기를 많이 생산하기 위해 가축의 운동을 제한하고 특수 사료를 주어 단기간에 살이 찌도록 하는 곳)에서 보내게 되는데, 비육장은 과밀하고 더러운 공장식 농장으로 바닥에는 오물이 가득하다.

도살할 때가 되면 돼지 못지않게 소들도 죽음을 향한 통로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버틴다. 소들이 일관공정 라인에 도착하면 기절당하고, 발에 사슬이 둘러져 거꾸로 매달리고, 피를 뽑히며, 내장이 들어내지고, 가죽이 벗겨진다. 많은 소들이 의식이 있는 채로 다음 단계로 끌려간다. 소의 여정이 끝나는 지점은 스테이크 한 상자이다.

닭과 칠면조: 새대가리라고?

우리 대부분은 닭과 칠면조를 멍청하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멍청해서 고통조차 못 느낄지 모른다는 믿음을 가진다. 하지만 새들은 상당히 영리하다. 닭과 칠면조는 붙임성도 꽤 좋다. 미국에서 고기나 알을 얻기 위해 도살하고 소비하는 가금류의 수는 1년에 대략 90억 마리에 달한다.

이른바 ‘브로일러’ 즉 구이용 어린 닭과 칠면조는 고기를 얻기 위해 사육되는 데, 자연 상태에서 10년까지 살 수 있는 이들이 공장식 축산농장에서는 닭은 7주, 칠면조는 16주 밖에 살지 못한다. 이들의 수명이 그처럼 짧아진 것은 성장촉진제가 가득 들어있는 사료를 먹어서 빨리 자라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식용 가금류는 신체 구조가 여러 모로 변형되어 고통을 겪는다. 식용 가금류는 ‘브로일러 하우스’라고 불리는 메마른 사육장에서 짧은 일생을 보낸다. 이 사육장은 어찌나 빽빽하게 채워지는지 바닥이 거의 안 보일 정도다.

브로일러 하우스에서 살아남은 가금은 도축장으로 보내진다. 인도적 도축법은 가축을 죽이기 전에 의식이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가금류는 거기서 제외됐기 때문에 의식이 완전한 상태에서 도살된다. 미국의 일반대중은 연간 90억 마리 닭의 삶과 죽음을 목격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알 낳는 닭: 생산 또 생산

산란계(layer hen), 즉 알 낳는 닭은 달걀 생산을 위해 사육된다. 그들은 기업적으로 운영되는 부화장의 산업용 인큐베이터에서 태어난다. 수평아리는 경제적 가치가 없으므로 태어나자마자 폐기한다. 암평아리는 ‘배터리식 닭장’ 즉 철사로 만든 작고 좁은 닭장들에 수용한다.

닭들은 날개 한 번 펼 수 없는 이 공간에서 먹고 자고 배설하며 평생을 보낸다. 이 닭들은 10배나 많은 알을 낳도록 유전자가 조작되었기 때문에 뼈가 허약해서 부러지기 쉽다. 산란계는 만 한 살이 넘자마자 도축장으로 보내진다.

젖소: 짜고 또 짜고

소를 해치지 않고도 우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유제품이 동물 학대와 무관하다고 자연스럽게 가정한다. 그러나 대량 생산된 모든 동물성 식품이 그렇듯 현대의 우유 생산도 전혀 자연스러운게 아니다. 우유생산을 최대화하기 위해 젖소에게는 유전자 조작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히고 해마다 인공적으로 임신을 시킨다.

지속적인 임신과 젖분비는 소의 몸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에 많은 소가 다리 불구가 되거나, 유선염에 걸려 유방에 심각한 염증이 생기기도 한다. 소의 신체 시스템이 이처럼 과로하다 보면 정상적인 신진대사 과정으로는 감당하기가 어려우므로, 풀만 먹는 타고난 초식 습관을 곡물과 고단백, 육류와 골분(뼛가루)으로 이루어진 육식성 사료로 보충해 준다.

젖소들이 견뎌야 하는 가장 큰 고통은 해마다 출산 후에 겪는 정서적 고통이다. 새끼가 수놈이면 송아지 고기를 생산하는 데 사용되고, 암놈이면 유제품 생산에 쓰인다. 낙농공장에서는 보통 송아지를 생후 몇 시간 만에 어미에게서 떼어 놓는다.

젖을 인간의 몫으로 돌리기 위해서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어미 소도 새끼가 없어지면 격앙되고 안달을 한다. 소들의 타고난 수명은 대충 20년이지만 낙농장에서는 4년만 지나면 용도 폐기가 되어 도축장으로 보내진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분쇄육 중 상당 부분이 젖소 고기다.

송아지: ‘쓸모없는 부산물’의 운명

우리 대부분은 새로 태어난 송아지를 보면 동정심을 갖는다. 그러나 젖소가 낳은 수송아지는 낙농업자에겐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버려진다. 출생한 지 며칠 뒤, 심지어 몇 시간 뒤에 이들은 트럭에 실려 경매장으로 가서 팔린다.

대부분의 송아지는 16주 내지 18주 동안, 사슬이나 밧줄에 목이 묶인 채 좁은 우리에 갇혀 지낸다. 송아지 고기의 특색인 연한 빛깔을 내기 위해 철분이 거의 없는 비정상적인 사료를 먹이기 때문에 송아지들은 만성빈혈을 오가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 신경증적 행동을 보이게 된다. 송아지를 도살하는 방식은 일반 육우나 돼지의 경우와 마찬가지여서, 족쇄를 채워 거꾸로 달기 전에 먼저 기절시키게 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현실과 거리가 멀다.

물고기 등 해양동물: 식품인가 생명인가

우리 대부분은 물고기를 비롯하여 흔히 먹는 바닷속 동물과의 거리감이 워낙 커서 그들의 살은 고기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바다생물의 살을 고기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은 그들을 동물로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들에게 쾌락이나 고통, 그리고 자신의 생명에 대한 어떤 감각이나 지각이 있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어류와 그 밖의 바다 동물에게도 지능과 고통을 느끼는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는 연구 결과가 상당히 많다.

물고기는 주변 상황에 대한 ‘머릿속 지도’를 만들어 환경의 변화를 기억하고 그에 맞춰 행동할 수 있다. 또한 물고기는 자기 몸 여러 부분에 아픔을 느끼는 통각수용기를 갖고 있으며, 인간의 엔도르핀처럼 진통 작용을 하는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한다.

또다른 연구에서는 바다 동물들이 고통에 반응해 외상후 증상을 겪을 수도 있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100억 마리의 바다 동물이 살육되며, 그 대부분을 인간이 먹는다. 이들을 잡고 기르고 죽이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상업적인 고기잡이와 양식이다. 상업적인 고기잡이 때문에 전 세계 물고기 종의 70%가 고갈됐을 뿐 아니라 다른 종의 바다 동물들에게도 심각한 해를 끼친다. 바다의 생물다양성을 보존하기 위해 포획된 어류보다 양식된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어류 양식에 쓰는 먹이의 대부분은 바다에서 나온다. 어류를 키우는 양식장은 수백만의 물고기 및 다른 바다 동물을 기생충과 질병이 만연하는 과밀한 우리에서 키운다. 질병을 통제하고 성장을 촉지하기 위해, 그리고 생식행동을 조절하기 위해 양식 동물들에게 항생제, 살충제, 호르몬을 투여하고 일부는 유전자르 변형시키기도 한다.

화학물질들은 양식 동물에게 흡수되고 주변 환경에도 들러붙어 결국은 우리의 소화기관과 생태계로 들어온다. 물고기가 바다 우리에서 도망치는 일도 드물지 않은데 그럴 경우 질병을 퍼뜨리거나, 번식을 통해 유전자 풀을 오염시킬 수 있다.

물고기는 여러 방법으로 도살된다. 바다에서 나오는 식품, 해산물의 생산에 내재하는 폭력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의 적어도 일부를 목격하게 마련인 많은 사람들이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바다 동물이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달라 보여서-너무나 이질적으로 느껴져서-거리감이 아주 크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이 번연히 드러날 때도 알아보지를 못하는 듯하다.

주저앉는 동물: 죽음의 문턱에 서다

주저앉는 동물, 공식적인 표현으로 ‘보행 불가능 가축’은 병이 심하거나 많이 다쳐서 혼자 힘으로는 일어서고 걸을 수 없는 (육상)동물을 이른다. 사육장이나 경매장에서는 이들을 돌보지 않고 죽게 놔두는 수가 많다.

도축장 벽이 유리라면

도축장 벽이 유리로 되어 있다면 모든 사람이 채식주의자가 될 것이다(폴 매카트니). 우리가 식육생산의 실상을 안다면 계속해서 동물을 먹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정도 식육생산의 진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동물이 고기가 되기까지의 단계들에 대해서는 짚어 보려 하지 않는다.

또한 동물을 먹으면서 그 행위가 선택의 결과라는 사실조차 생각하려 들지 않는다. 이처럼 폭력적 이데올로기는 불편한 진실을 의식하면서도 동시에 의식을 못하도록 조직되어 있다. 이것이 육식주의의 요체다. 폭력적 이데올로기 안에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무언의 계약이 있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정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잇는지를 알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신념과 행동을 이끌 때,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자유를 빼앗아 버리는 시스템의 희생자가 된다. 진짜 현실은 어떠한지를 알게 될 때, 그 시스템의 작동 원리를 인식할 때, 오직 그때에만 자유로운 선책이 가능해진다.

제4장 부수적 피해: 육식주의의 또 다른 희생자들

미국에만 돼지나 다른 종들처럼 3억 이상의 동물들이 상품으로 또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된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희생자다.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이라는 동물이다. 식육을 생산하는 공장의 일꾼들, 동물밀집사육시설 부근의 주민들, 육류 소비자, 납세자들이다.

우리가 바로 육식주의의 부수적 피해자다. 우리는 건강과 환경과 세금으로 육식주의의 비용을 댄다. 육류 소비자들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오염물을 먹는다. 합성 호르몬과 항생제, 독성 살충제, 제초제 및 살균제,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석유, 독극물을 먹은 쥐의 시체, 흙, 털, 분변 따위 온갖 물질이 들어있는 고기를 먹는 것이다.

우리가 고기를 먹을 때 ‘똥’(shit) 뿐만 아니라 부패와 질병, 병든 시스템이 낳는 쓰레기를 함께 먹는 것이다. 육식주의와 같은 폭력적 이데올로기의 핵심적 특성은 간접적 피해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안전한가?

오늘날 정육공장의 상황은 과거보다 더 나쁘다. 공장이 훨씬 더 커지고 기술 발달로 처리 속도가 한층 빨라진 데다 연방 검사관의 수도 부족하기 때문에 작업자들의 부담이 증가했을 뿐 아니라 작업장도 더 혼잡해져서 단속이 그만큼 어려워졌다.

1980년에 통과된 새 법안에 따라 품질관리의 책임이 정부에서 공장 자체로 옮겨졌다. 그런데 회사가 이 일을 맡기는 고용인 대다수는 오염과 질병의 징후를 제대로 찾아내기에는 교육과 경험이 부족했다.

또한 작업자가 오염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해도 식품의 품질기준이 너무 낮기 때문에 결함이 많은 고기들이 여전히 검사를 통과한다. 그리고 건물과 기계의 비위생적인 상태도 사람들의 건강에 위협이 될 수 있다. 결국 상황을 종합해 보면 회사들에게 스스로를 감시토록 하고는 방치하는 셈이다.

도축장의 인간동물

정육공장의 작업은 미국에서가장 위험하고 가장 폭력적인 노동이다. 폭력적 이데올로기 아래서 동물을 죽이는 일을 맡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무감하고 닳아 있는게 아니라 폭력을 불안해하고 불편해하다가 점차 익숙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순응 과정은 방어기제의 하나인 일상화(routinization) 에 의한 것이다. 이는 어떤 행동을 일상적으로 거듭하다 보면 민감성이 소실되어 무감각해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무감각해지면 해질수록 그만큼 정신적 스트레스도 더 쌓인다. 어느 수준을 넘는 폭력을 경험하면 그로 인해 정신적 외상을 입게 마련이다.

정신적 외상을 입은 작업자는 동물과 사람 모두에게 더욱더 폭력적이 되고, 자신의 긴장과 고통을 마비시키기 위해 중독적 행동을 하게 된다. 자신이 충격과 고통을 겪고는 그 정신적 외상을 다시 다른 대상에게 가하는 작업자들, 그들은 육식주의라는 폭력적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희생자다.

우리 행성, 우리 자신

식육 생산은 모든 심각한 형태의 환경파괴에서 주요 원인 노릇을 한다. 가장 직접적인 환경문제는 동물밀집사육시설(CAFO)에 의한 오염이다. 공장식 농장에서 나오는 엄청난 폐기물은 화학물질과 질병의 덩어리로, 땅속과 수로에 스며들고 대기 중으로 증발하여 환경을 오염하며 인근에 사는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 육류의 환경비용 또한 엄청나다.

축산업은 세계 최대의 수질오염원이며, 전 세계에서 포획되는 물고기의 60% 내지 70%는 가축의 사료로 쓰인다. 그리고 소와 거기서 나온 거름에서 생기는 메탄가스는 자동차 3,300만 대가 유발하는 것과 맞먹는 지구온난화 효과를 낳는다.

폭력적 이데올로기는 본래 비민주적이다. 기만과 비밀, 권력 집중, 강제 등 자유로운 사회와는 양립할 수 없는 관행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어느 한 산업에 힘이 지나치게 집중될 때 민주주의는 부패한다.

육류와 관련해서 바로 그런 사례를 본다. 경제학자들은 어떤 산업이든 상위 4개 이하의 회사가 해당 시장 거래액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집중률을 보일 경우 시장의 경쟁도가 낮아져 심각한 문제들이-특히 소비자 보호 분야에서-발생한다고 경고한다. 축산업계와 정부는 서로 얽히고 설켜 있는 바람에 사리의 추구와 공익을 위한 행정업무 간의 경계가 흐려질 지경이다.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이 이처럼 뒤엉켜 있는 것은 식육산업에서 벌이는 대규모의 정치자금 제공과 로비 활동 때문이기도 하다. 식육산업은 자신들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우리에게는 엄청난 피해를 주는 법안의 통과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축산업계가 너무도 막강해져서 법 위에 존재할 뿐 아니라 법 그 자체가 되었다면, 법을 따르기보다 만드는 존재가 되었다면, 우리는 민주주의 즉 인민의 지배가 ‘고기의 지배’로 바뀌었다고 무리 없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미국 성인의 97% 이상이 동물로 만든 식품을 먹는다. 동물성 식품의 섭취와 질병 사이의 연관성을 밝힌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위험에 대한 경고는 어디에도 없다.

제5장 육류의 신화: 육식주의를 정당화하기

동물과의 접촉을 그렇게도 절실히 원하는 사람들이 이제 곧 동물 우리 앞 식료품점에 가서는 쇠고기, 햄, 또는 닭고기를 사 들고 나온다. 이 사람들은 업계의 울타리 안에서 해마다 100억 마리의 동물이 불필요하게 고통 받고 죽어 가는 데 대해서는 어쩐 일인지 전혀 분노하지 않는다.

정당화의 세 가지 N

불과 몇 분 전에 우리가 껴안고 어루만졌던 바로 그런 동물들의 고기를 먹으려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의식조차 하지 않을 만큼 확고하게 동물을 먹는 일의 정당성을 믿어야 한다. 폭력적 이데올로기는 허구를 사실로 내세움으로써, 그리고 진실을 드러낼 우려가 있는 모든 비판적 사고를 방해함으로써 유지된다.

육류에 대한 방대한 신화들이 있는데, 정당화의 3N과 연관되어 있다. 육류를 먹는 일은 normal, natural, necessary 라는 것이다. 3N의 정당화는 고기를 먹을 때 느낄 수도 있는 도덕적 불편함을 완화해 준다.

신화를 만드는 사람들

신화제작자란 특정 체제의 기둥 노릇을 하는 기관들과 그 대변자들을 두루 이른다. 전문직업인들은 폭력적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 한 가지가 해당 이데올로기가 내세우는 신조의 틀을 짜는 것이다. 또 동물들이 어떻게 취급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에서 ‘이성의 목소리’로, ‘합리적인 온건주의자’로 행동하는 것이다.

또 전문직업인은 체제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을 환자로 취급하거나 방해한다. 축산 기업들과 그 경영진은 각종 기관과 전문직업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책과 여론을 움직이게 함으로써 육류의 신화를 적극적으로 유지해 간다.

권력을 가진 조직이 전문직업인들의 조직을 후원하는 것이다. 신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기본적 역할은 기존의 신화가 계속 건재하도록 보장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육류에 대한 신화의 경우는 시대의 흐름에 걸맞도록 손질하며 재순환시킨다.

공식적인 승인: 합법화

신화의 실천적 목표는 시스템의 합법화이다. 이데올로기의 합법화에는 사회의 모든 제도와 기관이 참여하지만, 법률제도와 뉴스 미디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법률상 인간은 자신의 사유재산인 동물을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를 갖는다.

또한 정보의 주요 원천인 뉴스 미디어는 이데올로기와 소비자 사이의 직접적인 통로 구실을 함으로써 육식주의를 뒷받침한다. 미디어가 육식주의의 비가시성을 지켜 주는 방법은 ‘생략’과 ‘금지’이다.

뉴스미디어는 육식이 ‘원래 그런 것’일 뿐 아니라 당연히 그래야 하는 정상적인 것, 그리하도록 되어 있는 자연스러운 것, 그럴 수 밖에 없는 필요한 것이라는 식으로 설명하면서 육식주의를 우리 앞에 대령한다.

육식은 정상적이다

고기를 먹는 사람 대부분은 자기가 육식주의 시스템의 신조에 따라 행동하고 있으며 자신의 가치관과 선호, 행동양식의 상당 부분이 그 시스템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자신도 모르게 학습해 온 것은, 인간의 생명이 다른 종의 생명보다 훨씬 귀중하기 때문에 인간의 입맛을 다른 몇몇 종의 생존 욕구에 우선시키는 일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편의상으로나 사회적 관계의 측면에서나 고기를 먹는 편이 안 먹기보다 훨씬 쉽다. 또한 어떤 행동이 관습이나 전통에 속할 경우, 세월을 이겨낸 생명력과 시스템 유지에서 해온 역할 때문에 의문이 별로 제기되지 않고 정당화하기가 훨씬 쉽다.

육식은 자연스럽다

육식은 단지 사물의 자연적 질서를 따르는 일로 받아들여진다. 자연화된 행동양식도 대부분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만큼, 스스로를 ‘자연적 위계질서’의 맨 꼭대기에 놓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즉 동물은 ‘본래’ 인간에게 먹히게끔 되어 있다고 믿는다.

자연화를 이론적으로 지원하는 주요 분야는 역사학과 종교, 그리고 과학이다. 역사학은 해당 이데올로기가 항상 존재해 왔음을 입증하기 위해 역사적 초점과 몇몇 ‘사실’들을 선별하여 제시한다. 종교는 그 이데올로기를 신이 정해 준 것처럼 떠받들며, 과학은 이데올로기에 생물학적 근거를 제공한다.

육식은 필요하다

고기가 꼭 필요하다고 믿게 되면 육식주의 시스템은 불가피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고기를 먹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음을 안다. 그런데도 시스템은 육식이 필수적이라는 신화가 진실인 듯이 가동하는데 이는 암묵적이고 맹목적인 가정으로, 흔히 그렇듯이 이의가 제기될 때에만 그게 단지 가정이었음이 드러난다.

또 하나의 신화는 육식이 우리의 건강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련 연구들을 보면 육식은 오히려 건강에 해롭다고 봐야 한다. 현대 산업사회의 주요 질병 중 몇몇이 고기 섭취와 관계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육식을 중단하면 동물을 식용으로 생산하는 일이 중단될 것이다. 그러니 사육 동물 숫자의 급증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육식의 필요성에 관한 또 다른 신화는 동물의 도살이 경제적으로 긴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살을 중단한다고 해서 경제 자체가 붕괴하지는 않는다. 다만 육식주의가 폐지되면 육식주의 기업들의 권력구조가 치명타를 입게 될 것이다.

자유의지라는 신화

폭력적 이데올로기는 자발적 참여자를 요구한다. 사람들에게 강요가 아닌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한다고 믿는 자유의지의 신화를 믿도록 하는 것이다. 육류와 관련된 당신의 행동양식은 말을 배우기도 전에 틀이 잡혀서 평생 그대로 지속돼 왔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행위가 아무런 변화 없이 오랜 세월 반복되는 걸 보면서 우리는 육식주의가 자유의지를 얼마나 무력화하는지를 알게 된다. 우리가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는 한, 자유의지를 행사하기는 불가능하다.

시스템 안에 남아 있는 동안에는 육식주의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마련이다. 잃어버린 공감 능력을 되찾고, 우리가 느끼고 믿게끔 학습된 것 말고 우리가 진정으로 느끼고 믿는 바를 반영하는 선책을 하려면 우리는 시스템 밖으로 나와야 한다.

제6장 육식주의의 거울 속으로: 내면화된 육식주의

육식주의는 우리에게 스스로를 압제하는 일에 첨여하라고, 시스템의 일을 대신 하라고 강요한다. 그래서 우리는 육식주의의 존재를 부정하고 회피하며, 그럼으로써 정당화한다. 정신이 육식주의에 갇히면 우리는 세계와 우리 자신을 시스템의 눈을 통해 보게 된다.

그 결과 실존하는 우리로서 행동하지 않고 시스템이 원하는 모습의 우리로서 행동한다. 우리는 능동적인 시민이 아니라 수동적인 소비자다. 육식주의 시스템의 메커니즘이 이 정도로 의식에 뿌리를 내렸다면 우리는 육식주의를 ‘내면화’한 것이다.

인식의 트리오

내면화된 육식주의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왜곡한다. 동물은 살아있는 생명체임에도 우리는 그들을 살아 있는 물건으로 본다. 또한 그들이 각기 독립된 개체임에도 불구하고 추상적으로 뭉뚱그려서 인식한다.

그리고 아무런 객관적 근거도 없이, 그들이 자연이 정한 식용 동물이므로 우리가 그들을 먹는 일은 타당하지 않겠냐고 생각한다. 이런 방식으로 동물을 보는 데는 ‘인식의 트리오(Cognitive Trio)' 라고 부르는 세 가지 방어기제가 개입한다.

인식의 트리오란 ’대상화와 몰개성화, 이분화‘를 말한다. 이것들은 보다 내면적이고 덜 의식적이고 의도적이다. 무엇을 생각하느냐보다는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더 연관된다. 세 방어기제는 동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각기 고유의 효과를 미치지만, 이들의 진짜 강점은 셋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작용한다는 데에 있다.

대상화: 동물을 물건으로 본다

대상화(objectification)는 살아 있는 존재를 생명이 없는 물체, 하나의 사물로 보게 되는 과정이다. 동물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대상화되는데, 가장 두드러진 방법은 언어를 통해서이다. 대상화하는 언어는 거리두기의 강력한 메커니즘이다.

도축장 작업자들이 자기가 죽이려는 동물을 소니 돼지니 하는 산 동물의 이름으로 지칭하지 않고 그들을 가지고 만들 제품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생각해 보라. 닭은 ‘broiler' 로, 돼지는 ’rasher' 로, 소는 ‘beef' 로 부른다. 대상화는 언어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제도와 법률, 정책에 의해서도 정당화된다. 법에서는 동물을 재산으로 분류한다. 동물을 물건으로 보면 그들의 신체도 물건으로 취급할 수 있다. 생명체로 볼 경우에 느낄지 모를 도덕적인 불편함 없이 말이다.

몰개성화: 동물을 추상적으로 본다

몰개성화(deindividualization) 란 개체를 집단 정체성의 차원에서만 보면서 그 집단의 다른 모든 개체와 똑같은 특성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몰개성화는 다른 개체들을 ‘오로지’ 한 집단의 구성원으로만 생각한다. 전체를 구성하는 각 부분의 개별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동물에 대한 인식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분화: 동물을 범주로 가른다

이분화(dichotomization) 는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두 개의 종종 대립되는 범주로 나누는 것이다. 이분법은 단순한 분류가 아니다. 그것은 이원론적이어서 현실을 흑과 백으로만 그려낸다. 육류와 관련해서 우리가 동물에게 적용하는 두 개의 주된 범주는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다. 이 이분법 안에는 또 다른 범주쌍들이 있다.

예컨대 우리는 야생동물보다는 가축을 먹고, 육식동물이나 잡식동물보다는 초식동물을 먹는다. 그리고 돌고래처럼 지적이라고 생각하는 동물은 먹지 않지만, 소나 닭처럼 그다지 영리하지 않아 보이는 동물은 일상적으로 먹는다.

미국인들은 귀엽다고 여기는 토끼같은 동물은 먹지 않고 칠면조처럼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동물은 먹는다. 이분화의 목적은 단지 고기를 먹는 데 대한 불편감에서 놓여나는 데 있다. 이분화는 정당화를 지원한다.

기술은 왜곡하고 격리한다

과학기술은 우리가 특정 동물들을 물건처럼, 그리고 추상적 개념처럼 취급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인식의 트리오를 강화한다. 물건이라 한 것은 그들이 도축장의 동물해체 라인에서 말 그대로 ‘생산 단위’ 가 되기 때문이며, 추상적 개념이라 한 것은 고기를 얻기 위해 엄청난 수가 도살되는 가운데 동물들은 불가피하게 몰개성화되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대규모의 식육 생산은 순전히 과학기술 덕에 가능해졌다. 현대 기술에 힘입어 우리는 동물들이 식품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일절 목격하지 않으면서 해마다 수십억 마리의 동물을 먹을 수 있다.

고기가 이처럼 대량으로 생산되는 한편 그 과정이 우리에게서 격리돼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동물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폭력적이자 덜 폭력적이게 되었다. 더 많은 동물을 죽일 수 있게 된 동시에 그들을 죽인다는 사실에 대해 덜 둔감해졌고 덜 편안해졌다는 뜻이다.

기술은 우리 행동과 가치관 사이의 간격을 더 벌려 놓았고, 그럼으로써 시스템이 그렇게도 숨기려고 애쓰는 도덕적 부조화를 한층 강화했다.

동일시와 공감과 혐오감

인식의 트리오는 동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왜곡함으로써 우리가 그들과 ‘동일시’하는 것을 막는다. 타자와의 동일시란 그들에게서 자신의 어떤 면을 보고, 자신에게서 그들의 어떤 면을 보는 것이다. 동일시는 인식 과정의 하나인데, 우리가 동물을 물건으로, 또는 추상적 개념으로 보거나 고정된 범주들로 분류되는 품목 정도로만 생각할 때 동일시의 과정은 약화된다.

그리고 생각은 감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동일시가 적을수록 그들에 대한 공감도 줄어든다. 이런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유사성의 원리’ 로 설명한다. 누군가와 동일시하는 정도가 그에게 공감하는 정도를 결정하듯이, 대체로 공감의 정도는 그 대상을 먹는다는 생각에 대한 혐오감의 정도를 결정한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공감 정도가 큰 동물일수록 그것을 먹는 일을 더 부도덕하게-그래서 혐오스럽게-느끼게 된다.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불쾌하게 느껴지는, 다시 말해 옳고 그름에 관한 자신의 감각에 위배되는 생산물을 소비하는 일에 혐오감을 느낀다는 게 대체적인 결론이다. 우리는 먹을 수 있는 동물의 고기에 혐오감을 느낄 수 있다.

혐오감이 우리를 마비시키는 방어기제를 뚫고 나오는 그 같은 경우, 우리에겐 안전망 노릇을 할 예비용 방어 수단이 필요하다. 불합리를 합리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합리화(rationalization)' 란 합리적이 아닌 무언가에 합리적 설명을 제공하는 방어기제다. 다른 방어기제와 마찬가지로 합리화는 시스템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육식주의의 거리두기 과정이 교란되어 혐오감이 생겨날 경우, 그 도덕적 불편함을 외면하기 위해 우리는 문제의 혐오감을 생명체를 먹는다는 사실이 아닌 뭔가 다른 이유 탓으로 돌릴 수 있다. 혐오감에는 오염성이라고 부르는 특징이 있다.

혐오감의 대상과 접촉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 또한 혐오스러워질 수 있다는 뜻이다. 혐오감은 흔히 ’관념적인‘ 것이다. 문제의 음식이 실제로 무엇인지보다는 그 음식에 대한 관념이나 믿음에 의해 유발될 수 있다는 얘기다.

매트릭스 안의 매트릭스: 육식주의의 스키마

육식주의는 사회적 시스템, 사회적 매트릭스다. 그러나 또한 심리적 시스템, 생각의 시스템, 즉 ‘내적’ 매트릭스이기도 하다. 그것은 매트릭스 안의 매트릭스다. 심리적 매트릭스도 사회적 매트릭스처럼 우리 의식 속의 공백 즉 단절된 부분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만들어졌다. 이 심리적 매트릭스를 ‘육식주의의 스키마’라고 부른다.

육식주의 스키마의 주된 요소는 인식의 트리오지만 방어기제들과 신념들도 각기 나름의 역할을 맡고 있다. 육식주의 스키마는 어떤 동물을 먹을 수 있고 어떤 동물은 먹을 수 없는지를 결정하고 우리가 고기를 먹을 때 무엇을 느낄지, 느낌을 가질지 말지를 결정한다.

스키마는 정보를 ‘거르기도’ 한다. 육식주의 스키마는 우리 의식 속의 단절 부분을 그대로 유지시키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며, 이 공백을 메워 줄 위험이 있는 정보의 지각은 왜곡되게끔 방해한다.

바꿔 말해서 육식주의의 스키마는 우리가 무엇을 인지할지, 인지한 것을 어떻게 해석할지, 그리고 인지한 것을 기억할지 말지를 모두 결정한다. 정보를 왜곡함으로써 터무니없는 소리도 이치에 잘 닿는 말처럼 만드는 육식주의 스키마의 존재는 우리가 왜 이 시스템의 부조리를 보지 못하는지도 설명해준다.

수십억 동물의 생과 사보다 육질 기준의 완벽한 구현을 더 중시하는 게 얼마나 부조리한 일인지는 우리가 육식주의의 스키마를 해체해 버릴 때에야 비로소 이해하게 될 터이다.

출구는 여기다: 육식주의 매트릭스의 허점

육식주의 시스템은 부조리와 모순과 역설로 가득 차 있다. 시스템이 스스로를 보존하는 데 그토록 진력해야 하는 까닭은 뭘까. 우리는 본래 동물들에게 마음을 쓰기 때문이고 진실을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가 동물들에게 무관심해야 하므로, 시스템은 속임수 위에 세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육식주의의 매트릭스는 우리가 거짓된 삶을 용인하는 한에서만 진실을 차단할 수 있다. 당신은 육식주의 매트릭스 밖으로 걸어 나와, 시스템이 당신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그토록 노력해 온 공감 능력을 되찾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 공감의 길을 따라 당신은 육식주의의 출구를 찾을 것이며, 공감의 도움 아래 그 문을 통해 걸어 나와 보다 인도적인 사회를 만들어낼 것이다.

제7장 바로 보고 증언하기: 육식주의에서 공감으로

사람들 내부의 육식주의 방어기제들이 무너지면 동물에 대한 공감으로 대체된다. 우리는, 우리를 진실에 눈감게 하는 육식주의 시스템을 거부해야 하며, 동물들이 당하는 불필요한 고통의 진실, 그리고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마음으로 본다: 증언의 힘

증언을 할 때 우리는 단순한 관찰자로 행동하지 않는다. 우리가 증언하는 대상의 경험에 정서적으로 접속되는 것이다. 우리는 ‘공감’하며, 그럼으로써 우리 의식 속 단절된 부분을 메운다. ‘증언하기’는 우리를 진실과 결합시키기 때문에 그 공백을 메운다.

또한 우리를 육식주의의 관행에 관한 진실과 결합시킬 뿐 아니라 우리의 내적 진실 및 공감 능력과도 접속시켜 준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뿐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증언하는 것이다. ‘집단 증언’은 사회적 의식의 공백을 메운다.

대중의 집단 증언은 육식주의에 무엇보다도 심각한 위협이 되기 때문에 시스템 전체가 이 과정을 막기 위해 조직된다. 사실 육식주의를 방어하는 메커니즘들의 유일한 목적은 증언을 막는 것이다.

증언하기는 시위나 촛불집회, 현수막, 강연, 예술 창작 등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증언은 창조적 행위였다. 창조 행위인 증언은 파괴에 대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인 듯하다. 증언을 통해 상황을 바꾸려 드는 것이다.

무감에서 공감으로

대중의 집단적 증언은 모든 폭력적 시스템에 위협적이다. 시스템의 생존이 집단 증언의 반대 상황인 집단적 ‘해리(dissociation)' 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해리는 육식주의의 가장 중요한 방어기제로서 정신적 마비의 핵심 메커니즘이며, 다른 모든 방어기제의 지원을 받는다.

해리란 우리 경험의 진실로부터 심리적, 정서적으로 단절되는 현상으로, 당사자는 온전한 자신이 아닌 듯한, 의식의 어느 부분이 결여된 듯한 느낌이 든다. 육식 문제와 관련해서 해리는 우리가 자신의 행동과 자신이 실제로 느끼고 있을지 모르는 것 사이를 연결하여 진실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요컨대 해리로 인해 우리는 스스로의 진정한 느낌을 반영하는 선책을 할 수 없게끔 무력화된다. 증언은 해리 상태를 해소하고 보다 통합된 사회를 불러 온다. 이처럼 통합된 사회의 사람들이라면 동물들에게 마음을 쓰면서도 광범한 동물 학대를 지지하는 모순된 행태를 보이지 않을 터이다.

증언에 대한 저항감

우리가 저항감을 갖는 가장 명백한 이유는 시스템 자체가 그런 저항을 조장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배적 시스템은 우리가 그들의 규범에 순응토록 강제함으로써 자신의 지배를 유지한다.

육식주의의 진실에 대한 증언을 회피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올바로 보고 증언하는 일이 괴롭기 때문이다. 육식주의의 진실을 바로 보고 증언하기를 어렵게 만드는 또 다른 요소는, 그처럼 거대한 규모의 고통 앞에서 우리는 ‘저걸 어떻게 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하며 무력감을 느끼게 마련이라는 점이다.

저항감을 갖는 마지막이자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이제는 동물을 죽이고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면 인간으로서의 우리 정체성이 문제시된다는 점이다. 인간의 우월성을 믿는 우리의 의식에 도전한다는 얘기다.

증언은 인간이 자연 세계 전체와 서로 연계되어 있음을 인정하게 만든다. 우리는 동물에 대해 느끼는 바와 똑같은 공감과 연민을 우리 자신에게도 보여야 한다. 연민을 가지고 스스로를 바라볼 때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비난과 심판 없이 직시할 수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시스템이 우리를 저항이 가장 적은 길로 인도하면서 희생자로 만들었음을 깨닫는다.

시대정신 바로보기

육식주의에 대한 도전이 시의적절하다고 믿을 이유가 있다. 환경 위기의 인식이 확장됐고, 동물 복지에 관한 우려가 커졌으며, 채식주의의 신뢰도와 대중적 인기 또한 높아지고, 육식주의와 채식주의에 관한 정보들을 접하기가 유례없이 쉬워졌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환경보호는 모든 사람에게 갈수록 더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사람들의 걱정이 커지면 육식주의의 관행에 대한 우려 또한 확산되게 마련이다. 이 같은 상황을 생각할 때, 동물 복지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이 늘어난 것도 우연만은 아니다.

이에 더해, 한때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이자 영양학적으로도 문제가 많다고 여겨지던 채식주의가 주류에 진입하고 있다. 의료계에서도 식물 위주의 식사가 육식 위주의 식사 못지않게 건강에 좋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연구 결과가 꾸준히 나온다. 육식주의에 도전할 때가 되었다고 하는 마지막 이유는 이 시스템의 주된 방어 수단인 비가시성이 약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식육산업이 자기네의 비밀을 대중에게 숨기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육류의 신화를 유지하기 위해 정보를 통제해 온 축산업계는 이제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통제되지도 않는 정보 출처에 의해 도전받고 있다. 바로 인터넷이다. 육식주의는 시스템을 가린 장막을 걷어내면 그 힘은 사실상 사라져 버린다.

증언의 실천: 무엇을 할 수 있나

육식주의의 본질인 엄청난 고통을 직시할 때 누구든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낄 수 있지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존재한다. 세 가지를 실천해 보자. 동물로 만든 제품의 소비를 일절 하지 않거나 줄일 것. 동물 옹호 단체를 지원할 것.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정보를 입수할 것. 동물성 식품을 일절 먹지 않는 게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먹는 양을 줄이기만 해도 동물과 자신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공부하고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일 법하다. 적극적으로 정보를 찾아서 익히고 문제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지 않으면 식육 생산에 대한 깨달음은 사그라질 것이다.

육식주의 너머로

대규모의 육류 소비를 가능케 하는 메커니즘들 자체는 육식주의에 고유한 게 아니다. 육식주의는 다수의 확고하게 자리 잡은 이데올로기들 중 하나일 뿐이다. 육식주의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몸담은 모든 체제에 대해 보다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돕는다.

증언도 마찬가지다. 파괴적인 이데올로기들은 구조적 특징이 서로 비슷하므로, 육식주의의 진실을 바로 보고 증언하는 일은 다른 시스템들에 대해 증언할 때 참조할 틀을 제공할 수 있다. 증언이라 단순히 우리가 ‘행하는’ 무엇이 아니라, ‘존재하는 방식’ 이다.

증언은 스스로에게 힘을 실어 주는 행위이기 때문에 증언을 많이 할수록 그 능력이 커진다. 공감과 연민이나 마찬가지로 우리의 증언 능력도 발휘하는 만큼 자라는 것이다.

증언하는 용기를

증언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증언을 하는 데는 시스템이 제시하는 ‘가장 저항이 적은 길’을 따라가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증언을 하는 데는 인간 영혼의 잠재력을 실현하는 용기 또한 필요하다. 인간이 지닌 최상의 자질들, 즉 신념과 성실, 공감, 동정심등을 불러내라고 요구한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될 수 있는 최선의 존재가 되고자 하는 근본적 욕구가 있다. 어려움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강력한 증인으로 행동할 능력을 지녔다. 궁극적으로, 증언하는 일에는 어느 한쪽을 편드는 용기가 필요하다.

중립은 압제자를 돕지 절대로 희생자를 돕지 않는다. 침묵은 괴롭히는 자에게 용기를 주지 결코 괴롭힘을 당하는 자에게 용기를 주지 않는다. 증언하는 행동을 통해 우리는 주어진 역할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역할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독후감:

본서를 읽으면서 '육식주의‘(Carnism)란 용어를 저자가 만들었다는 데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저자는 사회심리학자이다. 인간과 동물과의 관계, 환경과의 관계를 연구하는 사람이다. 별다른 의문 없이, 맛있으니까, 건강에 필요해서, 지금까지 그렇게 먹어 왔으니까 등의 이유로 먹어왔던 육식의 섭취 안에 담겨있는 깊은 의미를 사회심리학적으로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왜 고기를 먹는가를 분석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고기를 멀리하고 채식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책이다. 본서를 읽으면서 고기가 식탁에 오르기 전까지의 과정을 묘사한 부분에서는 참으로 잔인함과 역겨움까지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먹는 고기가 진정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지금까지 몰랐다는 것-알면서도 굳이 외면했는지도 모른다-이 신기했고, 고기를 먹는다는 것이 너무나 더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고기만 먹는 것이 아닌 악마적이고 폭력적인 이데올로기 시스템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고기를 먹는 것은 단순히 내 건강을 해치는 일-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뿐만이 아니라 동물을 학대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일에 일조하는 것이며 폭력적인 육식산업체를 돕는 일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매스 미디어를 통해 알고 있던 육식과 유제품에 대한 건강정보도 역시 잘못된 것이란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또한 동물은 음식의 한 종류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 즉 개성 있는 독립된 개체로서 대접받아야 할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심리학적 용어들을 사용해 가면서 우리가 별 생각 없이 먹는 육식습관에 대해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 나아가 우리가 이제는 육식주의에 대항해 실생활에서 채식을 실천하고 끊임없이 공부하고 증언할 것을 권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채식주의의 신뢰도와 대중적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는 글을 읽으면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게 되었다. 비록 아직까지는 주변에 채식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고 또한 채식위주의 전문식당을 발견하기도 쉽지 않은 현실이긴 하지만, 점점 더 시간이 지날수록 채식인구가 확산이 되고 동물에 대한 보호와 인식의 변화, 환경 보호 운동도 확산될 것으로 기대해 본다.

200여 쪽에 불과한 작은 책이었지만, 그 내용은 상당한 양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해하기 조금 어려운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흥미와 관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한 내용들이 가득했다. 무엇보다도 책의 제목이 먼저 시선을 끌었었고, 전체적인 내용은 존 로빈스의 개념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것 같다.

다른 점은 육식주의에 대한 사회심리적인 접근 방법이었던 것 같다.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 이제는 개와 돼지와 소를 동등한 개체로 인정하고 생명공동체로 공존하는 평화로운 세계가 되길 희망하는 마음을 품어본다.

2011년 3월 4일 주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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