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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페미니즘에서의 채식주의의 의미/정고미라
한채연 2004-12-27 12:39:14

에코페미니즘에서의 채식주의의 의미

/정고미라

1. 에코페미니즘과 채식

2. 육식사회의 가축제도와 가부장적 사회의 여성지배

2-1. 육식의 필요성에 대한 신화
2-2. '고기'의 사회적 구성 : 이데올로기 및 제도화된 폭력
2-3. 성매매와 동물매매

3. 육식문화의 사회적 비용

3-1. 육류산업의 경제적 비용
3-2. 육류산업의 환경적 비용
3-3. 육식문화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

4. 대안적 실천에 대하여

4-1. 물리적 소비의 재구조화
4-2. 정신적 소비의 재구조화
4-3. 규범적 운동에서 벗어나기

1. 에코페미니즘과 채식

에코페니미즘{{) 에코페미니즘에 대한 소개서들은 이미 많이 나와 있어서 여기서는 이론적 논의들은 생략하겠다. 나는 '에코페미니즘', '생태여성주의'를 구분없이 사용하겠다.}}은 여성과 자연의 유사한 억압에 대해 논의해왔고, 남성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가 빚어낸 비참한 결과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광범위하게 지적해왔다. 그런데 여기서 동물에 대한 일반적인 고려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동물에 대한 사육과 매매, 도살 등이 여성과 아동에 대한 매매와 착취와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동물에게 고통을 주거나 죽이는 문화는 페미니즘과 양립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채식은 입맛이나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캐롤 아담스는 '고기'(meat)라는 용어가 중성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판단이 들어간 것이며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자신의 논의에서 육식하는 사람을 '신체, 몸을 먹는 사람'(corpse eater, flesh eater)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고기라는 용어는 유일한 존재로서의 각각의 동물을 비가시화시키고, '이 고기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라는 질문을 의식차원에서 다루지 않을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기'는 '물질 덩어리화'시키는 용어(mass term)로서 실제 동물의 존재를 사물화시키는 방식으로 작용한다(Adams, 1994:27).

아담스는 자신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자기가 기르던 말이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때 무척 상심해서 있던 중, 햄버거를 먹다가 갑자기 애도 속에서 매장될 말의 몸과는 달리 햄버거 속에 있는 소의 몸은 그저 하나의 물질덩어리로 취급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자신의
관점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일년 후에 채식주의자가 되었다고 한다(Adams, 1994:162-63).

내 경우는 변화가 오랜기간에 걸쳐서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오랫동안 개를 키우며 교감을 나누는 경험을 하면서 종종 내가 먹는 다른 동물들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있었다.

특정 동물들은 야생동물 또는 애완동물로 보호받고 있는 반면, 특정 동물들은 가축이라는 이름하에 '정당하게' 감금되고 도살되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그저 단편적으로만 갖고 있었다.

고기를 먹는 행위의 다차원적 의미들을 생각했을 때 자연스럽게 채식하는 경향이 생기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맛있는 고기맛을 거부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고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기 이전에 수십년 동안 내가 익숙해져버린 음식으로서의 고기맛이 체화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아담스는 바로 이와같은 '맛의 체화'가 수많은 종류의 신화들을 낳고 있음을 다방면으로 보여주고 있다.

유년기부터 고기를 먹어온 사람들이 자신의 입맛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론들을 만들어내는가에 관해서 그녀가 보여주는 설명은, 유년기부터 여성을 성적대상으로 소비해온 남성들이 - 이미지로서든, 물리적으로서든 - 매매춘의 필요성에 대해서 또는 남성의 생물학적 성욕에 대해서 만들어낸 수많은 신화들이 유사한 맥락임을 알게 한다.

또한 이것은 몸에 해로운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 또는 버릴 의지가 없는 - 개인이 그것으로 인해 파생되는 피해들을 만회하기 위해 수많은 종류의 보약들을 찾고 만들어내는 것과도 유사한 맥락이다.

과학이 성중립적이지 않고 남성중심적 이해관계를 반영하듯이 그것은 인간중심적 이해관계를 반영하고도 있는 것이다.

에코페미니즘은 여성과 자연이 비슷한 방식으로 억압, 착취되고 있는 것에 주목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육식과 채식이 개인적 차원의 기호이고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마치 매매춘이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차원을 보지 못한 채 개개 남성들의 사창가 출입을 개인적 성적성향의 문제로 파악하는 것과 같다.

아담스에 따르면 죽은 동물의 생산이 경제영역의 문제이고 죽은 동물의 구매가 가정영역의 사적인 문제로 이해되고 있는 구분은 그와 비슷한 오류이다.

'개인적(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여성주의는 사적영역 내에 존재하는 권력관계들에 주목하였다. 나는 생태여성주의가 사적영역의 지평을 근본적으로 넓혀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글에서 육식문화의 배후에 있는 거대한 지배 및 착취관계가 인간사회의 여타의 지배, 착취와 동일한 맥락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보임으로써 에코페미니즘의 해방이념이 이분법을 넘어서 포괄적이고도 근본적인 변화를 옹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사회적 차원뿐만 아니라 개인적 차원의, 일상생활 속의 실천이 요구되며, 무엇보다도 이 실천을 가능케해주는 내면적 차원의 실천이 요구된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한다.

2. 육식사회의 가축제도와 가부장적 사회의 여성지배

2-1. 육식의 필요성에 대한 신화

인간을 포식동물로 규정하는 관점에서는 다른 육식동물의 사례들이 동원되어 하나의 종이 다른 종과 먹고 먹히는 관계를 맺는 것이 자연의 순리라고 주장된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이 '자연스러운' 것인지를 추정하거나 규정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선 동물들 중에서(인간을 제외하고) 육식동물은 전체의 20%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은 초식동물들처럼 되새김질을 할 수 있는 위장이 없을지는 몰라도 모든 영장류는 일차적으로 채식동물이다. 비록 일부 침팬지들이 육식을 부분적으로 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음식물의 4% 이하를 차지한다.

침팬지들은 다른 육식동물들처럼, 적어도 신체적인 조건에 있어서는 다른 동물을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인간보다 유리하다. 그들은 가죽을 찢을 수 있는 긴 송곳니를 갖고 있다.

그러나 원시인류는 이미 35억년 전에 송곳니를 잃었고 야채, 곡물, 견과류, 과일 등을 씹는 데에 더 적합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우리는 사냥감을 뜯어 먹을 수 없다.

동물들처럼 방금 죽인 몸을, 날 것의 형태로 먹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다른 음식물과 더불어 먹고 있다. 과연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무엇이라고, 무엇을 근거로 이야기할 수 있는가(Adams, 1994:99-100).

특히 '자연의 순리'를 강조하는 담론들에는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보는 관점에서처럼, 주어진 현상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부인하고 있고, 따라서 변화의 가능성을 보려하지 않는 태도가 내포되어 있다.

또, 육식의 필요성에 대한 담론은 '먹이사슬' 관점으로부터 논리의 기반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경쟁과 적자생존으로 설명되는 다아윈적 생물학은 점차로 자연내의 공존과 공생에 대한 새로운 발견들로 변형되어가고 있다.

표층에서 보면 모든 것이 분리와 대립, 지배와 위계로 구성된 듯이 보이지만, 심층으로 가면 갈수록 세계와 우주는 근본적으로 조화로운 '하나됨'을 실현하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증거들이 계속 제시되고 있다.

사실, 현재 육식의 필요성을 담론화하는 주요한 주체는 바로 육류 및 유제품 산업이다. 동시에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확립된 가부장적 제관계들 때문이기도 하다.

2-2. '고기'의 사회적 구성 : 이데올로기 및 제도화된 폭력

많은 사회들에서 고기는 남성을 위한 남성적인 음식으로 여겨지고 있고 채소는 여성들을 위한 음식으로 여겨진다. 특히 자원이 빈곤한 상황일수록 여성들은 고기에 대한 접근이 차단되는 경향이 있다.

19세기의 한 의학박사는 문명화된 백인 중산층 남성에게는 신경이 피로할 때 더많은 고기를 먹을 것을 권고하였지만, 여성과 그밖의 다른 인종들은 진화단계에서 더 낮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역시 고기에 비해서 더 낮은 진화단계에 있는 곡물식품과 과일 등이 더 적합하다고 보았다.

또한 채식만으로도 생존하는 '야만인'들은 육식을 하는 문명인들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설명되었다.(Adams, 2000:40-41)

남성은 강하고, 또 강해야 하기 때문에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여겨졌고, 고기를 먹지 않는 남성은 '여성화'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샌대이(Peggy Sanday)의 인류학적 연구에 따르면 동물에 기반한 경제권의 문화들은 대체로 남성의 권력과 연관되고, 남성 神들이 숭배되고, 성별분업에 있어서 여성들이 노동을 더 많이 하며 그녀들의 노동은 덜 가치화되어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반면에 경제가 주로 식물에 기반한 문화들에서는 여성의 채집이 중심활동이 되는데 여성들은 생산물의 분배에 있어서 차별을 행하지 않는 편이다(45). 고기는 여러모로 가부장제의 상징으로서 코드화될 수 있는 것이다.

원시인들은 사냥으로 동물을 살해한 후에 관례적으로 속죄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선사시대의 라스꼬 동굴벽화에서는 죽기 직전의 들소가 죽인 사람을 노려보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있다.{{) 죠르쥬 바따이유. 조한경(역). [에로티즘]. 민음사. 1989. 81쪽.}}

다른 생명체들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맺는 속에서 이들은 자신이 하는 행위의 의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동양문화권은 상대적으로 이러한 감수성을 간직한 편이라고 여겨진다. 언젠가 티브이에서 수백마리의 쥐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한 연구자들이 죄의식에 시달려 쥐들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서야 마음이 편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의 세계에서 동물 및 자연은 극단적으로 기계적이고 생기없는 물질수단으로서 대상화되어 있다. 속죄행사를 치를 필요도 없이, 현대의 동물을 먹는 사람들은 아예 동물의 죽음을 인식조차 하지 않는다.

동물애호가들조차 이런 인식을 하지 못하는 것은, 동물살해의 폭력이 제도화되어서 가축이라는 이름으로 동물들이 '자연화'되었기 때문이다.

식탁에 오른 '고기'는 땅을 파서 캐낸 석유만큼이나 그저 자연자원에 지나지 않고, 햄이나 소시지는 일종의 '가공과정을 거친 자연'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가축제도 및 동물의 몸(시체)을 먹는 행위는 여타의 다른 억압적 행위 및 구조들처럼 뿌리 깊은 편견과 합리화에 의존하고 있다. 폭력이 제도화되었을 때 사람들은 착취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문제의식을 갖더라도 이를 정리할 수 있는 윤리적 틀을 갖지 못하게 된다. 육식이라는 제도화된 폭력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는다.

첫째, 그것은 타자(동물)의 불가침성(inviolability)에 대한 침해이고 몰이해이다.

동물들은 농장에 갇혀있기를 원하지 않고, 실험실에서 해부되기를 원하지 않고, 서커스나 동물원에 있기를 원하지 않고, 도살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둘째, 그것은 물리적 손상과 처우남용을 행한다.

가축들은 좁은 공간에 갇혀있기 일쑤이고 근육발달을 막기 위해 움직이지 못하는 조건에 처해있
다. 평생 갇혀있다가 도살되기 하루 전부터는 아예 음식물도 받지 못한다.

셋째, 그것은 일련의 부인하는(denial) 메카니즘을 갖는다.

폭력이 제도화될 때 실제로 존재하는 폭력성은 은폐된다. '고기', '육식'이라는 용어에는 동물이 경험하는 고통과 죽음이 은폐되어 있다.

그 덕분에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언어의 스크린을 통해서 자신의 행동을 보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들은 끔찍한 도살의 현실을 부인하고 책임을 피할 수 있다고 자기기만을 하게 된다.

넷째, 그것은 '적합한' 희생자를 정해준다.

식용으로 이미지가 구성된 소나 돼지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적 느낌을 갖지 않게 한다.

마치 강간해도 되는 여성(매춘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을 구별하는 이데올로기처럼, 죽여도 되는 동물과 그렇지 않은 동물을 구별시킨다.

그러나 성폭력에 적합한 희생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종(種)폭력에 적합한 동물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섯째, 그것은 사회전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가축으로 인한 수질오염과 쓰레기, 사료를 위한 삼림벌채와 같은 환경문제, 소비자의 건강문제, 육류산업의 노동자에 미치는 문제 등이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소비자로 하여금 이 과정에 대해 수동적이 되도록 조종한다.

사람들은 유년기부터 식탁에서 동물을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 믿게 되고 어린이의 문제제기는 묵살된다.(Adams, 1994: 9장)

이처럼 동물에 대한 제도화된 폭력은 철저하게 정상성을 띠게 되고 '고기' 또는 '육식'은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이데올로기화되고 탈정치화된다.

특히 '고기'라는 용어는 동물의 개별적인 실제 삶을 한낱 고기덩어리로 추상화시킨다.

'고기'의 지시대상은 부재하고 동물을 죽인 주체도 사라진다. 그런데 여성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추상적 언어화가 행해지고 있다.

성적대상의 이미지로 구성된 여성의 몸은 종종 탈인격화된 '부위'로서 부각되고 있고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익명적인 몸으로서 이미 개별적 존재감이 인정받지 않게 된 경우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의 문장은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Meat is like pornography: before it was someone's fun, it was someone's life.(Adams, 1994:53)

포르노와 성매매, 성산업은 여성을 동물취급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여성의 성적대상화를 비판하는 수많은 논의들은 이를 충분히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동물취급'의 내용이 동물들에게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2-3. 성매매와 동물매매

여성에 대한 성적학대와 동물학대는 다양한 차원에서 연관되어 있다.

첫째, 성적학대의 대상이 되었던 여성과 어린이들은 피해를 받는 과정에서, 남성가해자가 이들을 통제하고 위협하는 수단으로 동물(주로 애완동물)을 위협하거나 실제로 죽이는 상황을 직면하곤 한다.

둘째, 여성과 어린이들이 성폭력을 당하는 과정에서 동물이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되곤 한다. 즉 동물과의 강제적인 관계를 갖게 하는 경우를 말한다.

셋째, 성폭력을 경험한 어린이들이 동물을 학대하게 되는 것에서처럼, 성적인 학대는 피해자의 동물에 대한 태도에 특정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러한 성향은 이후에 성폭력과 살인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포한다.

포르노그래피의 한 장르는 여성과 동물간의 성관계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여성의 몸이 동물과 동일시되고 있다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들이 여성의 몸과 동일시되고 있다는 사실에도 있다.

스펠만(Elizabeth Spelman)에 따르면 신체혐오증(somatophobia)은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종차별주의를 드러내고, '경멸받는 몸들'에 대한 적개심은 상호 얽혀있다.

서구의 철학전통에서 나타나는 영혼/몸의 이분법은 동물을 영혼이 없는 존재로 봄에 따라 그들을 소비재라는 수단으로 존재화시킨다.

또한 현대의 포르노에서 (백인)여성과 동물이 연결지워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에 흑인여성이 동물로 묘사되었던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여성, 어린이, 동물에 대한 학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비가시화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동물의 몸 먹기'(육식), 사냥, 동물실험과 같은 동물학대는 그것이 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비가시화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화된 비가시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관계적 인식론이 요구된다.(Adams, 1994:145-154)

사창가를 둘러본 사람들은 흔히 그 풍경을 정육점에 비유하곤 한다.

붉은 조명 아래 진열되어 있는 '아가씨'들은 손님이 보고 고를 수 있도록 최대한 구미에 맞게 포장되어 있거나 적당히 벗겨져 있다.

정육점에서는 동물들이 이미 죽어있다는 차이가 있지만, 사창가의 여성들도 '사회적으로'는 죽은 몸들이나 마찬가지이다.

사창가의 여성들이 손님들을 밝은 웃음으로 유혹하고 있듯이, '고기화'된 동물들도 제품 포장지나 광고에서, 그리고 고기집 간판에서 밝게 웃고 있다.

모두들 먹어주기만을 바라고 있는 듯하다. 여성을 성적으로 소유하는 행위를 '먹었다'고 표현하는 사실은 양자간의 유사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된다.

그러나 사창가에서나 정육점에서나, 여성은 존재하지 않고 동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부재하는 지시대상'(absent referent)(Adams, 2000:2장참조)은 소비자의 편의를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고기를 먹는 사람들 중에 자기가 직접 돼지를 잡아서, 살겠다고 박박 소리지르는 것을 목을 따서 죽여서 칼로 배를 잘라서 내장을 꺼내고 요리를 해서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이러한 행위는 신분이 천한 이들에게 귀속되어왔다. 양반들은 자신의 감수성에 거슬르는 일은 백정에게 전가시켰고, 자기네들은 고기를 먹으면서도 백정에 대한 경멸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인간이 동물을 착취하는 과정은, 그 속에 또다른 피지배층에 대한 착취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물에 대한 착취는 동시에 동물과 유사한 방식으로 취급되는 집단들 - 창녀, 유태인 학살, 인디안 원주민 학살, 흑인 노예화, 기타 하층집단들 - 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작용해왔다.

다른 한편, 사창가에서 창녀가 동물취급받는다는 말은 마치 여성이 영혼이 없는 고기덩어리로 여겨진다는 말을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영혼이 없는 동물과는 달리 여성은 영혼이 있다는 데에서 오는 분노의 감정이 들어있다.

다시 말해, 여성의 인간성과 동물의 자연성(즉 영혼없음)이 여전히 대비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서구 중세시대의 신학자들이 여성에게도 영혼이 있을까를 놓고 논쟁을 벌였던 사실은 어쩌면 적절한 시사점을 던져줄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성주의가 가축제도의 이면에 있는 지배논리를 포착하지 못한다면, 경계선의 '이동'으로 환원되는 많은 해방논리들의 한계를 그대로 답습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포르노 사이트에 나타난 영상자료들은 여성의 가슴만 보여주는 코너, 성기만 보여주는 코너 등으로 나뉘어지는 등, 몸의 부위와 연령대, 몸에 가해지는 새디스트적 행위 등이 마치 메뉴처럼 고를 수 있게끔 되어있다.

소의 몸을 부위별로 골라서 구매하는 데에 익숙해진 소비자에게 이러한 분절화는 정당한 소비행위에 대한 권리로 인식되기까지 한다.

여성주의는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이 취하는 동물적 은유들을 드러내는 데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그 은유 이면에 존재하는 동물들의 현실에 주목함으로써 다양한 억압들이 어떻게 문화적으로 동시에 생산되는지를 드러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물질과 영혼이 어떻게 폭력적으로 이분화되고 있는지를 자각하는 일을 뜻한다.


3. 육식문화의 사회적 비용

3-1. 육류산업의 경제적 비용

육류산업에 지원되는 정부의 엄청난 보조금은 여성과 아동이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그만큼 덜 받는 결과를 낳는다.

다음의 세가지 사례를 들 수 있다.(이하 Martin:1994 참조)

첫째, 캘라포니아 주정부가 육류산업을 위한 물을 지원하는데 드는 비용은 연간 240억 달러인 반면, 주정부가 아동복지서비스를 위해 쓰는 예산은 고작 4억 2천5백만 달러이다.

둘째, 서구 16개국에 대한 한 정부조사에 따르면 공공토지에서 방목할 수 있도록 하는 가축농장주들에 대한 지원은 정부에게는 5230만 달러의 손실을 의미한다.

셋째, 육류산업에 대한 물의 지원이 없다면 가장 싼 가격으로 햄버거를 구매한다할지라도 1파운드당 35 달러를 지불해야 할 것이고 비프스테이크는 89 달러가 될 것이다(Adams 1994:94).

이는 정부가 육류산업을 위해 지원하는 비용이 엄청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입장에서 요구하는 복지서비스들을 위해서는 항상 자금이 부족하다는 답변이 주어지고 있다.

이밖에도 육류산업이 소비하는 자원의 양을 보면 다음과 같다.

미국의 전체 물의 50%는 육류생산과정에 관여되어서 소비된다. 육류, 유제품, 계란 등의 생산에서 소비되는 자원은 - 즉 가축과 그 생산물을 위한 먹이기, 집짓기, 기르기 등의 과정에 사용되는 자원 - 미국에서 소비되는 모든 천연자원의 1/3에 해당한다.

또, 미국이 채식을 일상의 음식물로 채택한다면 외국으로부터의 석유수입은 60% 삭감될 수 있다.

이처럼 육류산업이 자원들을 과도하게 소비함으로 인해서 돈과 권력이 적은 이들에게는 자원들이 더욱 더 부족하게 되고, 이것은 가격을 올리는 일이 되고, 또다시 빈곤층의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과 아동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이 미치게 된다.(Martin:1994)

3-2. 육류산업의 환경적 비용

미국에서 소비를 위해 기르는 가축들은 초당 250,000 파운드의 쓰레기를 배출하고 여기서 재활용되는 정도는 절반에도 못 미친다. 왜냐하면 재활용은 경제적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쓰레기는 우리의 물체계를 오염시킨다. 미국의 수질오염의 50%는 육류산업에서 기인하는데 이것은 다른 모든 산업들이 낼 수 있는 유기쓰레기에 의한 수질오염의 3배가 넘는다.

이 쓰레기는 물 속에서 암모니아와 질산염으로 전환되어 농촌의 우물과 도시의 수돗물에서 질산염 농도를 높이는 데 책임이 있다.

이것은 유아들에게 심각한 뇌손상 또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Martin:1994)

제임스 러브록은 지구온난화에 기여하는 치명적인 세 가지 요인으로 연료, 가축, 기계톱을 꼽을 정도로 가축이 지구환경에 끼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가축은 인류의 10배 정도의 분뇨를 만들어내고, 미국에서만 한 해에 배출된 가축의 분뇨량은 20억 인구의 한 해 배출량과 맞먹는다.

또, 세계에서 생산되는 전체 곡물량의 40%가 가축의 사료로 쓰이고 있고 미국의 경우는 그 비율이 90%에 달한다고 한다.

현재 중국과 인도를 합친 인구가 먹는 곡물의 양보다 가축이 소비하는 곡물의 양이 더 많은 것이다.(인터넷 자료)

지구상의 경작자들의 대다수를 점하는 여성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축과 사료를 위한 토지사용은 여성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토지가 그만큼 제한되는 것을 뜻한다.

중앙아메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산림지는 점차로 파괴되어가고 있는데 그렇다고 그곳에 사는 이들을 위한 곡식경작지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축산업은 토지를 소수에게 집중시켰기 때문에 농촌가족들의 절반 이상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땅이 없다.

브라질에서는 그 정도가 더 심해서 여성과 그 가족들은 육류산업에 이용되기 위한 땅에서 밀려나가고 있다.

멕시코에서는 생산된 전체곡물의 1/3 이상이 가축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가축사료를 위한 사탕수수와 콩이 토지를 차지함에 따라 주민들을 위한 주식의 가격은 높아지고 있다.

한편 여성들은 대체로 환경오염에 대해서 권력을 갖지 못한다. 어떤 오염물질이 배출되는가의 문제, 그것을 중단시키는 문제 등에 대해 영향력을 갖지 못하는 만큼 또 그로인해 자신의 삶에 미치는 영향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선택권도 적다.

뿐만 아니라 여성은 어린이를 보살피는 자인데, 아동이 환경오염에 훨씬 더 민감하게 영향받기 때문에, 아픈 아이를 돌보아야 하는 부담이 가중된다.(Martin,1994)

3-3. 육식문화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

오늘날 수많은 연구물들은 육식이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을 다각도로 증명하고 있다. 오늘날 동물성 음식을 기반으로 하는 장수촌은 지구상 어디에도 없고 오히려 장수의 비결은 채식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 보고되고 있다.{{) 채식위주인 파키스탄의 펀잡인족, 불가리아인, 카탄반도의 인디언, 동인도의 토다스족이 세계 최고인 90-100세의 평균수명을 유지하는 반면, 동물성 고단백을 섭취하는 에스키모, 그린란드인, 라플란드인 등이 세계 최저인 30-40세의 평균수명을 갖는다고 한다.(인터넷 자료)}}

세계에서 가장 많은 육류를 소비하는 미국이 '성인병의 천국'이라고 하는데 한국은 지난 70년대에 비해 최근에 와서 성인병 발생율이 서구에 육박하고 있고, 이는 지난 17년새에 육류소비가 2.5배로 늘어난 것에서 드러난다.

육류섭취는 유해물질의 섭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육류의 가공 및 요리과정에서 발암물질이 생겨나서 결장암, 유방암, 전립선암 등의 발병율이 높아진다.

특히 가축은 축사에서의 협소하고 불결하고 스트레스를 주는 환경, 운동부족 등으로 인해 각종 가축질병을 얻게 되는데, 이로 인해 가축에게 투여되는 항생제, 성장촉진 호르몬 등은 인간에게 암을 유발하는 물질이 된다.

또한 가축사료에서 잔류성이 강한 농약들이 인체내에 쌓이게 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있다.

자연계의 모든 물질은 고유의 파동을 내며 인체도 파동을 낸다. 몸이 성치 않을 때는 마이너스 파동이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축사의 동물들은 어미와 떨어져 살아야 하고{{) 가축의 암컷이 어떻게 집중적으로 착취되는지에 대한 문제 역시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볼 여지가 있는 문제이다. 암탉은 알을 빼앗기고, 돼지는 새끼로부터의 격리되고, 소는 젓을 강제로 제공하는 등, 암컷의 재생산권은 극도로 이용당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 외에도 심한 스트레스 하에서 도살장에서 죽음을 당하는 과정에서 마이너스파를 내는 대표적인 음식물로 둔갑한다.

따라서 이런 고기를 섭취함으로써 병세가 악화될 수 있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병의 치료법으로 제시되는 식사법에는 순수한 채식이 이롭다.{{) 이상구 박사가 이끄는 뉴스타트 운동은 수많은 암환자들을 낳게 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가 제시하는 식단은 모든 어육류와 계란, 우유, 가공식품을 배제하였고 완전 자연건강 식품만으로 구성하였다.}}

최근의 과학적 연구들은 식물성 단백질이 동물성 단백질에 비해 결코 질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인터넷 자료)

한편, 남성의 신체를 기준으로 진행되는 대부분의 연구들은 여성에게 미치는 특수한 문제들을 소홀히하는 경향이 있다.

육식은 남녀 모두에게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여성에게 특별히 해로운 지점들이 존재하고 이러한 문제들은 연구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과도한 단백질 섭취는 체내의 칼슘을 잃게 만들어서 많은 여성들에게서 나타나는 골다공증의 주요한 원인이 된다.

또, 채식하는 소녀에 비해서 육식하는 소녀는 월경을 이른 나이(13세 이전)에 시작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월경을 일찍 시작하는 소녀들은 늦게 시작하는 소녀들에 비해 유방암에 걸릴 가능성이 4배나 높다고 보고되고 있다. 육식의 식단이 초래하는 건강문제에 대해서 여성들은 보
다 많은 정보와 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Martin,1994)

육식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은 쉽게 단언할 수 있는 명확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냥을 옹호하는 문화, 도살을 정당화시키는 문화는 근본적으로 주체와 대상간의 건널 수 없는 벽을 세우고 있음은 명백하다.

이것은 마치 전쟁의 문화가 어떤 감수성을 길러내는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것과도 같다.

주체로 인해 객체가 어떤 피해와 고통을 경험하는 지에 대해 절대로 무감각해지는 훈련이 요구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타자에 대해 공감하는 데에 실패하는 무능력이 지속적으로 재생산된다고 할 수 있다.

합리주의적 인식론에 따른 주체/객체의 이분법이 강화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불교에서 살생하지 말 것을 권하는 맥락에서 보더라도 채식은 피해의 최소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정신과 영혼의 건강에 대한 깊은 함의가 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식의 대안적인 실천이 제시될 수 있는지를 알아보자.

3. 대안적 실천에 대하여

3-1. 물리적 소비의 재구조화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는 생산과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서 경험된다.

그리고 생산은 '보존하기'(maintenance, 재생산)에 비해 더 많이 가치화되어 있다.

예를 들어 닭고기를 소비하는 사람은 도살당한 닭에 대해서나, 닭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미국에서는 가금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95%는 흑인여성이다. 이들의 이직률이 100%에 이른다는 사실은 노동환경의 실상을 짐작케한다.(Adams, 1994:82)}}에대해서 알지도 보지도 못한다.

그리고 소비행위는 중요한 경제적 지표로 작용하지만, 환경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들은 측정되지도, 가치화되지도 않고 있다.

가사노동이 GNP에서 계산되지 않는 것처럼, 가축제도로 인해 표토나 지하수 등이 치러야 하는 부정적 효과의 환경적 비용은 계산되지 않는다. 고기의 가격에는 환경파괴 비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보존하기'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는 개인적 차원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사회운동가나 활동가는 자신의 실천을 생산적인 것으로 여기지만 요리하기 위해 들이는 시간은 소모적이기만 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패스트푸드점에서 식사하거나 육류를 구매 하는 행위 등은 환경을 보존하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사고를 드러내는 일이다.(물리적 환경 뿐만 아니라 자기 몸의 건강이라는 의미에서의 환경을 포함하여). 그리하여 육식의 비용은 비가시적으로 남은 채, 파괴의 싸이클은 지속되는 것이다. 그러나 '보존하기'를 생산적인 행위로 파악한다는 것은 곧 자기 행위의 결과를 의식한다는 것을 뜻한다(Adams,
1994:93-97).

많은 동물실험들은 그 자체로서 필요불가결한 것은 아니다. 화장품, 세척제 등등을 테스트하기 위해, 또는 담배가 암을 정말로 유발하는지 알기 위해 동물실험을 한다는 것은 우리의 습관을 바꾸지 않은채, 즉 우리의 소비를 계속 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으로서의 동물실험이 필요불가결한
것 뿐이다(Adams, 1994:52).

나를 변화시키지 않은 채 내가 경험하는 세상을 보다 편리한 모습으로 바꾸려는 노력은 타자와 자신의 환경에 대한 손상을 가져온다.

생태환경의 파괴과정에 대한 자각은 '보존하기'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준다. 이것은 교환가치체계를 넘어서서 환경의 보존을 위해 어떤 생산적인 돈의 소비, 시간의 소비, 행동의 소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갖게 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당연히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
해서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3-2. 정신적 소비의 재구조화

인간은 소우주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몸은 자아가 활동하는 환경이다. 몸의 건강을 해치는 습관을 방치하는 일은 언젠가 병으로 결과하게 되어 있다. 병이 났을 때 치러야 하는 정신적, 심리적, 경제적 비용은 막대하다.

미국사회가 높은 육류소비로 인해 심장질환에 쏟는 수천억 달러의 의료비도 같은 사례이다. 과로하는 습관은 정신적 쾌락을 위해 자아가 모순을 육체에게 전가시키는 또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빠른 경제성장은 이윤을 위해 자본가가 모순을 노동자에게 전가시키는 일이듯이.

환경문제가 주는 교훈은 모든 것의 관계성에 있다. 즉 '함께'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우리는 '나'를 변화시키지 않은 채 상대(혹은 주변환경)만을 변화시키는 데에 온갖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다. 또, 자신의 생각이나 마음은 바꾸지 않은채, 그로 인해 생겨난 몸의 증상을 '치료'하는 데에 시간과 돈을 쓰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정상적인 표준으로서 이해되고 있다. 예컨대 건강을 지키기 위해 주어지는 많은 지침들은 우리가 지금의 잘못된 습관들을 고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해서 주어지는 지침들이라고 볼 수 있다. 육식의 필요성에 대한 영양학적 논의들도 마찬가지이다. 고기를 먹어야지 기운이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운동과 수련을 통해서 기운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려 하지 않는다.

정신적 소비의 재구조화는 다른 말로 하면 자율성을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너무나 힘든 일처럼 다가오는 경향이 있다. 외부세계의 변화를 위해서는 치열한 싸움을 서슴지 않는 사람도 내면세계의 변화를 위한 작업을 하는 일은 죽기보다 힘든 것처
럼 반응하곤 한다.

밖에서 온갖 자원봉사를 하면서도 집에서는 청소하는 데에 '차마' 시간을 들이지 못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매일 값비싼 비타민과 보약을 사먹을 수는 있지만 매일 마음을 '치유'하는 작업을 하기엔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도 같다.(그러나 비싸게 구입한 약들 속에는
자신의 노동시간이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가? 여기에는 보이는 세계에 대해서만 감각이 훈련되어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보이지 않는 세계로 진입해들어왔을 때, 막다른 골목에서 무(無)와 맞닿아있는 것같고, 청소하는 일은 겉으로 티가 나지 않고, 마음수련하는 일은 당장에 몸에 아무런 변
화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존하기'의 효용을 읽어낼 수 있는 감각이 개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비의 재구조화는 청교도적인 검소함에 대한 억압적인 명령이 아니다. 이것은 무조건 줄이기의 철학도 아니고 빈곤의 철학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보다 근본적인 풍요와 충만함의 철학이다. 필요의 범위를 최소화시키는 과정은 자율성의 능력을 최대화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사실은 약간의 인내심을 갖고서 직접 실천을 해야만이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이기에 그토록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닭고기를 먹으면서 흑인여성노동자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사회적(물리적) 관계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닭고기를 보면서 도살장의 닭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사회적(인간중심적) 이데올로기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몸을 학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의식(마음)의 에너지관계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보이지 않는 질서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엔트로피를 줄이는 일이
며 궁극적인 조화를 이루어내는 일일 것이다.

4-3. 규범적 운동에서 벗어나기

그러나 분명히 이것은 이어지는 과정의 스펙트럼으로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소비는 최소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지 당장에 소비를 아예 없애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비를 줄이는 정신을 갖는 것과, 소비를 없애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후자는 또하나의 억압적인 이분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육식을 그른 것으로, 채식을 옳은 것으로 이분화시키는 일은 극복해야 할 이분법을 유지시키는 일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끊임없이 다음과 같이 따져들기를 좋아한다.

"다른 동물들의 고기는 먹으면서 개고기는 먹지 말자고 주장한다면 나는 설득될 수 없소. 하지만 당신이 쇠고기도 먹지 않는다면 개고기를 반대할 자격을 당신에게 줄 수 있겠소."

"다른 생명체(식물)는 먹으면서 동물은 먹지 말자고 주장한다면 나는 설득될 수 없소. 하지만 당신이 어떠한 생명체도 먹지 않는다면 채식주의를 주장할 자격을 당신에게 줄 수 있겠소."

여기서 불가능의 지점에 왔다고 생각하면서 옳고 그름을 판별하고자 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과정'에는 끝이 없다. 실제로 채식조차 안 하면서 물만 먹고 사는 사람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양애란씨는 34년 동안 물만 먹고 살아온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999년 9월 12일에 열린
제3회 국제신과학심포지엄에서 강사로 나와 자신의 체험을 털어놓았다. [양애란 이야기], 한
문화 출판사 참조.
}}

사람들은 절대적인 옳고 그름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진리의 외부적 권위를 따르고자하는 경향, 자신의 신성을 부인하고자 하는 경향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채식주의의 의미는 살생을 최소화하려는 태도에 있는 것이지 육식을 죄악시하려는 관점에 있지 않다.

생명 역시도 무생명과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이 있다. 인간은 살아있는 한 다른 생명체를 완벽하게 해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인간이 숨을 쉬고 물을 마시는 것도 살생이다. 왜냐하면 공기와 물 속에서만 살 수 있는 세균과 미생물은 위장 속에서나 폐속에서는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손을 씻고 대변을 보는 행위 역시 세균들을 죽이는 일이 될 수 있다.(하이텔 채식동호회의 글을 천리한 채식동호회에서 퍼온 글을 재인용한 것임. 2000.5.18).}}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다른 생명체에게 빚지는 일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위의 인용글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채식은 매일 100원에서 1000원 정도의 빚을 식물들에게 지는 것으로 볼 수 있어요.

이 정도의 빚은 평생을 지더라도 살아가면서 내면의 소리대로 성심성의껏 생활하고 자신의 앎을, 여유를 부족한 이들에게 베풂으로써 그 빚을 충분히 갚아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육식은 동물이 자신을 주기 싫은데, 그 소중한 생명을 억지로 빼앗는 것이므로 그 빚이 심히 큽니다. 1만원, 10만원, 100만원... 그 많은 빚을 매일매일 지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빚에 눌려 도저히 그 빚을 갚지 못하고 파산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에 가고, 윤회하여 동물로 태어남으로써 그 빚을 갚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내가 다른 생명체를 '당당하게' 섭취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은 아니다. 의무와 권리의 범위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은 그것이 주는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실재하는 얽힘과 빚짐의 관계들을 은폐시키고, 따라서 그 범위 내에서만 고마움을 제한시킴으로써 허위의 당당함과 권리의식을 갖게 한다. 육식에 대한 권리의식이 그것이다.

{{) 육식과 채식의 문제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적용되어야 하는 평등
개념은 '권리'적 접근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졸고, [평등개념의 여성주의적 적용방
식에 대하여 - 성별과 종 범주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여성과 평등> 기말레포트, 2000년 1
학기, 참조바람.}}

따라서 육식보다는 채식을, 채식보다는 소식을 지향하는 태도가 바로 '채식주의'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에너지원을 음식에만 의존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무슨 재미로 사느냐'라는 질문을 하고 싶다면 아직 이는 '보이는 세계'에서 좀 더 많은 경험을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일 것이고, 억지로 채식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병으로 망가진 몸을 이제는 치료가 아니라 치유를 하고 싶다면, 파괴되어가는 지구환경을 착취적으로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치유할 필요가 있음을 공감한다면, 데이비드 봄이 이야기한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가 어떻게 '눈에 보이는 우주'의 원인이 되는지를 숙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호킨스, 1997:130).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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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ams, Carol J. The feminist traffic in animals. in Gaard, Greta (ed). Ecofeminism - Women, animals, nature. Temple University Press. 1993.
Adams, Carol J. Neither man nor beast - Feminism and the defense of animals. Continuum:New York. 1994.
Donovan, Josephine. Animal rights and feminist theory. in Gaard, Greta (ed). Ecofeminism - Women, animals, nature. Temple University Press. 1993.
Jaggar, Alison (ed). Living with contradictions. Westview Press.1994.
Martin, Lisa. Feminism and vegetarianism. in Jaggar, Alison (ed).
Living with contradictions. Westview Press. 1994.
죠르쥬 바따이유. 조한경(역). [에로티즘]. 민음사. 1989.
호킨스, 데이비드. [의식혁명]. 한문화 출판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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