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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도덕적 지위/김성한 박사
한채연 2010-09-29 20:24:53

동물의 도덕적 지위

정리: 김성한 박사 (고려대)

1. 동물과 인간의 차이와 차별

대체로 보았을 때 인간과 동물은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으며, 이를 통해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일컬어진다.

(1) 오직 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한다.
(2) 오직 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한다.
(3) 오직 인간만이 도덕적 행위자이다.
(4) 오직 인간만이 이성적 능력을 갖추었다.
(5) 동물에 비해 인간의 지능이 높다.
(6) 나는 인간이며, 때문에 동물에 대한 인간의 차별은 정당하다.

(1) 오직 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한다.

동물들도 기본적인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은 동물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이는 영장류에게서 두드러진데, 가장 영리한 동물 중의 하나로 알려진 침팬지는 표범에 대항하기 위한 방어용 무기로 막대기와 나무 가지를 사용하며, 다른 동물이나 인간을 공격할 때 막대기, 돌 등을 집어던지기도 한다. 또한 침팬지들은 막대기로 흰개미 집에 구멍을 내고, 식물 줄기를 이용해서 흰개미를 낚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은 막대기를 이용하여 상자를 열기도 한다.

(2) 오직 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한다.

이에 대한 반례 역시 침팬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침팬지들이 인간의 언어를 분명하게 발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기본적인 의사소통 방식을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은 여러 실험을 통해 알려진 바 있다. 침팬지 중에는 200개 정도의 영어 단어와 기본적인 구문 규칙을 익혀서 화가 나자 신호 언어를 이용하여 “너는 푸른 똥이야”라는 의사 표시를 한 침팬지도 있었고, 오리를 물새로, 수박을 마시는 과일로 표현하는 침팬지도 있었다. 그리고 상호 간의 의사소통이 언어의 핵심 기능이라고 한다면 동물들이 기본적인 의사소통 도구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3) 오직 인간만이 도덕적 행위자이다.

도덕이 어떤 정의적 특성을 갖추었는가에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럼에도 동물들 또한 다소 원초적이지만 자신의 혈연,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 구성원들에 대해 이타적인 행동을 전형적으로 나타낸다. 또한 다수의 동물들은 자신에게 호의를 나타내는 대상에게는 마찬가지의 호의를 나타내려는 경향이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그 일관성이 인간을 넘어서는 경우도 있다. 개는 그 대표적인 예로, 주인에 대한 충직함은 널리 알려져 있는 바이다. 이와 같은 행동들은 인간적 의미의 도덕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원시적 의미의 도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오직 인간만이 이성 능력을 갖추었다.

이성적 능력을 기준으로 인간과 인간 아닌 동물의 차이를 보이면서 차별을 정당화하고자 할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일부 인간들을 차별의 대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 이유는 인간 중에서 이성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갓난아기나 어린아이는 대표적인 예로, 이들은 이성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며, 치매에 걸린 노인 또한 이성 능력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외에도 뇌사자나 식물인간도 이성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기 힘들며, 심각한 정신지체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도 그 상황은 마찬가지다.

(5) 동물에 비해 인간의 지능이 높다.

이와 같은 기준 또한 문제가 있는 기준인데, 만약 인간에게 있어 IQ가 150되는 사람이 IQ가 100인 사람에게 자신의 아이큐가 높다는 이유로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IQ가 높은 사람외의 그 어떤 사람도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IQ가 높은 사람마저도 어느 정도의 양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러한 기준이 차별을 정당화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한 지능 지수는 어느 정도 가변적이다. 그리하여 한 번의 검사에서 120인 지능 지수를 나타낸 사람이 다음 번 검사에서 지능 지수가 100으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능 지수라는 것은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한 매우 임의적인 기준이다. 만약 지능 지수가 차별을 정당화하는 기준이라면 감성 지수나 다른 지수들이 기준이 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백 번 양보하여 지능 지수를 기준으로 삼는다고 할 경우, 지능이 동물에 비해서 떨어지는 심각한 정신 지체인들이 있는데, 그들은 오히려 동물들에 의해 차별을 당해도 좋은 존재가 되는가?

(6) 나는 인간이며, 때문에 동물에 대한 인간의 차별은 정당하다.

단지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이유가 그 개인의 권리나 지위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별다른 이유 없이 단지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집단에 편승하여 다른 집단의 성원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는 것은 잘못인데,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성을 통해 다른 성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려 하는 경우는 성차별주의,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인종을 통해 다른 인종을 차별하려 하는 태도는 인종차별주의(racist), 마지막으로 단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을 우선적인 고려의 대상으로 삼겠다고 하는 인간의 편견을 동물해방론자들은 종차별주의(speciesism)라고 부르며, 이들은 모두 특정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이유로 차별을 정당화하려는 데에서 발생하는 잘못을 지적하는 용어들이다.

이제 우리는 어떠한 차이를 언급해도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다소 모호한 경우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남녀 또는 인종 간의 차이에 비해 그 차이는 두드러지지만,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평균적인 차이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위에서 제시되고 있는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일컬어지는 기준은 매우 임의적이다. 나아가 ‘차이’는 사실과 관계된 것임에 반해, ‘차별’은 가치와 관계된다. 이처럼 사실의 문제에서 가치의 문제를 도출하려 할 경우 소위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게 되는데, 인간과 인간 아닌 동물의 차이를 언급하면서 차별을 정당화하려 할 때, 이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지적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이며, 경계선 상에 놓여 있는 사례를 통해 차별이 부당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다소 억지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인간보다 지능뿐 아니라 모든 측면에서 우월한 존재인 호모 수퍼버스(Homo Superbus)라는 종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그들과 인간의 차이는 침팬지와 인간 정도라고 생각해 보자. 이 때 우리는 그들의 우리에 대한 차별이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2. 공리주의와 공평한 처우

이번에는 공평한 처우에 대해 생각해 보자. 공리주의자들은 동일한 ‘이익(interest)’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어떤 존재가 동일한 고통이나 행복을 느끼게 된다면 그 고통이나 행복은 동등한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리주의자들은 이를 ‘이익 동등 고려의 원리’라고 부른다. ‘이익 동등 고려의 원리’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적용된다.

A 10
B 50
C 100

예를 들어 A, B, C가 있고, A가 10의 고통을, B가 50의 고통을, 그리고 C가 100의 고통을 느낀다고 했을 때 공리주의자들은 100의 고통을 느끼는 C를 최우선적인 고려의 대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C가 현재로서는 가장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C를 최우선적인 고려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선생이 학생을 배려하는 데에서 이처럼 고통의 양을 기준으로 각각의 학생을 배려한다면 학생들은 선생의 이와 같은 방식의 결정을 합당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막상 A, B, C를 구체적인 사람들로 환원할 때 우리는 다소 주춤거리게 된다. 가령 A가 나와 친한 사람이고, B는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며, C는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경우, 우리는 논리적 일관성을 무시하고, 다른 선택을 흔히 하게 된다.

하지만 공리주의자들이 보았을 때, 최소한 이는 논리적인 일관성을 결여한 태도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친분과 무관하게, 또한 자신의 선호와 무관하게 객관적인 입장에서 선택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공리주의자들은 A, B, C가 누구이건, 그와 무관하게 고통을 기준으로 해서 배려의 순위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각종 차별 문제에 적용해 보도록 하자.

황인종 0
백인종 100

만약 내가 황인종이며, 단지 내가 황인종이라는 이유로 백인종이 더욱 고통을 받고 있음에도 백인종을 도와주지 않고 황인종을 돕는다면 이는 일종의 인종차별주의(racism)가 된다.

황인종 100
백인종 0

반면 내가 황인종이며, 단지 내가 황인종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황인종이 더욱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황인종을 도왔다면, 이는 겉보기에는 인종 중심적인 행동이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사실상 공평무사한 관점에서 황인종을 도운 것이 된다. 이는 최소한 공리주의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이다. 이번에는 동일한 논리를 남녀의 문제에 적용해 보도록 하자.

여 100
남 0

만약 내가 남성이고, 남성은 전혀 고통을 느끼고 있지 않음에 반해 여성은 100의 고통을 느끼고 있는 데에도, 단지 같은 성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에 남성의 고통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고 할 경우에는 공평성을 잃게 된다. 이는 일종의 성차별주의(sexism)가 되는 것이다.

여 0
남 100

이에 반해 내가 남성이며, 여성이 고통을 느끼고 있지 않음에 반해 남성은 100의 고통을 느끼고 있다면 나는 남성을 도울 도덕적 의무를 갖게 된다. 여기서도 역시 나는 단지 남성이 나와 동일한 성의 성원이기 때문에 남성을 도운 것이 아니며, 고통을 기준으로 남성을 도운 것이기 때문에 이는 도덕적인 선택을 한 것이 된다.

A 100
B 0

A 0
B 100

이제 우리는 A가 누구인지와 무관하게 만약 A가 더 고통을 받고 있으면 A를 도와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반면 만약 B가 더 많은 고통을 받고 있으면 B가 누구인지와 무관하게 B를 도와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와 같은 생각이 최소한 공평무사하다는 측면에서 옳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생각이 인간에게 적용되는 이상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상에서의 논리를 인간에게 적용할 때에는 대체로 수긍하다가도 막상 동물을 대상으로 이상에서의 논의를 적용할 때에는 갑자기 생각이 달라진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이 달라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누군가가 가장 커다란 고통을 느끼고 있다면 그 존재는 동물이건 인간이건 또는 천사이건 최우선적인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 외에 별다른 이유 없이 일관되게 동물의 고통을 외면하고, 인간의 고통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이는 공평무사하지 못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A와 B를 확인해 본 결과 A는 사람이고 B는 백묵이었다고 가정하자. 이 때에도 우리는 위에서의 논의를 일관성 있게 유지해야 하는 것일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 다시 말해 위의 계산법은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에게만 국한될 뿐,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존재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B가 백묵이었다면 위에서와 같은 계산 자체가 무의미해지게 되며,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유의할 점은 위에서의 고통의 양에 대한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코끼리의 엉덩이를 힘껏 때릴 경우와 인간의 아기를 동일한 강도로 때릴 경우 코끼리와 아기가 느끼는 고통의 양을 현저하게 다를 것이다. 동일한 강도로 때릴 경우 아마도 아기는 엄청나게 고통을 느낄 것임에 반해, 코끼리는 견딜 만할 것이다.

여기서 ‘동일한 강도’라는 것은 ‘고통을 가하는 존재’가 기준이 아니라, ‘고통을 느끼는 존재’가 기준이 되는 것이다. 만약 동일한 고통을 야기하고자 한다면 코끼리에게는 비교적 강한 강도로, 아기에게는 훨씬 약한 강도로 타격을 가해야 비슷한 고통을 느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쾌락이라는 것도 ‘쾌락을 느끼는 존재’가 기준이 된다.

3. 동물에게 도덕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에 대한 의문과 이에 대한 대응

먼저 위의 논의에서 주로 언급되었던 것은 ‘고통’이었다. 이에 따라 고통과 관련된 논의를 살펴보도록 하고, 그 다음으로 인간에게 미칠 수 있는 피해와 관련된 논의를, 마지막으로 생태계와 관련된 동물해방론자들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도록 하자.

1) 고통과 관련된 논의

(1) 동물이 고통을 느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과 신경 생리학적인 반응의 유사성, 그리고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갖는 생존에의 유용성 등을 들어 대응이 가능할 것이다.

(답변 1) 먼저 인간에서 고통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다른 사람의 우리는 행동이나 표정 등을 통해 다른 존재가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답변 2) 다음으로 우리는 모든 척추동물, 특히 조류나 포유동물의 신경계가 근본적으로 인간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동일한 상황에서 인간과 유사한 신경학적인 반응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스트레스를 받을 때 동물들 또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혈압이 오르고, 동공이 팽창하며, 맥박이 빨리 뛰는 등의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다.

(답변 3)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그러한 능력을 갖춘 존재의 생존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존재는 상해를 입었어도 그 위험성을 자각하지 못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최소한 유사한 신경계를 갖춘, 유사한 반응을 나타내는 동물들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2) 식물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가?

동물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이며, 따라서 동물을 먹어선 안 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반박이 제기된다. 만약 동물들이 고통을 느낀다면 식물들 또한 고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양자가 모두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어떤 경우이건 고통을 야기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식물을 선택하건 동물을 선택하건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답변 1) 이에 대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동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방법을 그대로 적용해 보면 될 것이다. 식물은 신경계를 가지고 있지 않고, 특정한 상황에서 인간과 유사한 행동이나 신경학적 반응을 나타내지도 않는다. 이렇게 보았을 때 현재로서는 식물들이 고통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분명치 않다.

(답변 2) 설령 식물이 고통을 느낀다고 해도 현대 과학의 증거를 포함해 몇몇 정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동물에 비해 식물이 고통을 느끼는 강도는 상대적으로 적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고통을 야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커다란 고통을 야기하기보다는 적은 고통을 야기하는 것이 좋다.

(답변 3) 식물보다 동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크다는 주장은 현대 과학의 기준이 적용된 것이다. 그런데 미래에 어떤 측정 방식이 발견되어, 식물에 비해 동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적은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경우 우리는 다소 늦었지만 채식에서 육식으로 전환을 해야 할 것이다.

(3) 고통의 비교가 불가능하지 않은가?

위에서 살펴본 논의는 고통의 양을 비교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고통이란 일종의 정신적 사건으로 지극히 내적인 경험이다. 이에 따라 사실상 고통을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답변1) 물론 여러 존재들의 고통을 정확히 비교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는 공리주의를 현실에 적용하는 데에서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확성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며, 직관적으로 비교가 가능한 사례도 분명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인간이 육식욕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 느끼는 고통과 식용 동물로 분류되는 동물들의 고통이다. 최소한 그들이 인간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며, 그 고통의 양은 극심하다는 표현만으로도 부족할 지경이다.

2) 인간의 문제 vs 동물의 문제

이제 우리는 동물들이 고통을 느끼는 존재이며, 그들의 고통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함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간의 문제를 더욱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어떤 다른 이유가 있더라도 우리는 인간이며, 이에 따라 인간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설령 동물의 문제가 중요성을 갖고 있더라도, 인간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채식을 함으로써 초래될 수 있는 건강상의 문제를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인간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수많은 인간의 문제들이 있음에도 인간의 문제보다는 동물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상식에 어긋난다. 설령 동물의 문제가 도덕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같은 인간 종으로서 인간의 문제부터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답변1) 하지만 동물해방론자들은 인간의 문제에 관심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육식과 기아 및 환경의 문제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기아의 문제를 고려해 보자. 언뜻 생각해 보았을 때, 공장식 농장에서 대량으로 사육되는 가축들은 우리의 식량 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우리에게 필수적인 영양소인 단백질을 예로 들어보자. 분석에 따르면 약 1 단위의 동물 단백질을 생산하기 위해 송아지는 무려 21 단위의 단백질을 섭취해야 한다.

이와 같은 결과가 나타나는 이유는 송아지가 고기로 팔리게 되기까지 먹어야 할 것을 감안해야 하며, 먹는 것이 모두 단백질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영양소에 있어서도 다를 바 없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처럼 곡물을 직접 섭취하는 것보다 곡물을 고기로 전환시켜 섭취하는 것은 낭비적인 과정이다.

만약 우리가 고기를 먹기 위해 가축에게 주는 곡물을 가축들에게 주지 않고 직접 활용한다면 전 세계적인 기아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미국인들이 1년에 10%만 고기 소비를 줄여도, 6천만 인구가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단순히 미국의 가축 수를 절반으로 줄이기만 해도, 비사회주의 저개발국가의 칼로리 부족액을 거의 4번 메우고도 남을 정도가 된다고 한다.

한편 가축들을 수용하기 위해선 일정한 땅이 필요하고, 그곳에 수용된 동물들로부터 오물이 배출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산림 파괴, 수질과 토양 오염 등의 환경 문제를 초래한다. 특히 지구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열대우림지대는 하루가 다르게 파괴되고 있는데, 이러한 파괴의 원인 중의 하나는 소 목초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여기서 더욱 문제가 되는는 것은 이와 같은 목초지에서 생산되는 고기가 그 국가의 국민들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서구인들을 포함한 선진국 사람들을 위해 생산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열대우림의 훼손에 대한 책임은 선진국 사람들의 육식욕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답변2) 동물의 문제와 인종 차별이나 기아 및 실업 등의 인간의 문제는 한쪽에 시간을 투자할 경우 다른 한쪽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다시 말해 동물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얼마든지 인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적극적으로 동물의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 캠페인을 벌인다던가,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을 벌인다면 문제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단지 육식을 하지 않거나 가죽 제품, 동물의 털로 만들어진 옷 등을 사용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사실상 동물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동물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사실상 인간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설령 인간의 문제에 훨씬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동물의 문제에 여전히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2) 채식을 함으로써 건강상의 문제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일부 사람들은 설령 동물의 고통을 경감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한다고 해도, 만약 채식만 함으로써 건강상의 문제가 초래된다면 불가피하게 육식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또한 채식을 함으로써 근력이 약화될 수도 있다는 염려를 하기도 한다.

(답변1)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동물 해방론자들은 최소한 채식이 건강을 해치지는 않으며, 나아가 채식을 함으로써 오히려 건강이 증진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심장마비 사망률이나 고혈압, 고지혈증, 콜레스테롤 수준 등은 육식을 즐기는 사람들에 비해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 현저하게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음식이 소화되는 시간과 위장 암의 발병은 비례 관계에 놓여 있는데, 위장 암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빨리 소화되는 채식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물론 육식으로만 얻을 수 있는 필수 영양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영양소 또한 영양제 등을 이용하여 충분히 보충할 수가 있다고 한다.

채식이 건강상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채식주의자들의 삶을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들은 수십 년 이상을 채식을 해 왔음에도 아무런 문제없이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채식이 근력을 약화시킨다는 것도 근거 없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소림사 무인들이 몰래 고기를 먹기 때문에 단단한 체력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 중에는 채식주의자들이 상당수 있다.

3) 생태계와 관련한 비판

(1) 동물들은 서로 잡아먹는데 우리는 왜 잡아먹지 못하는가?

우리는 야생 동물의 세계에서 육식 동물들이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는 모습을 흔히 보게 된다. 그런데 만약 동물들이 그처럼 서로 잡아먹는 관계에 놓여 있다면 우리라고 해서 굳이 서로 잡아먹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답변1) 먼저 육식 동물들이 다른 동물을 죽이는 경우는 대부분 생존을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다른 동물을 잡아먹지 않을 경우 생존이 불가능하다.

(답변2) 일반적으로 우리는 동물을 비하한다. 그런데 이처럼 동물들을 비하하는 사람들이 막상 고기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자신들도 동물들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답변3) 동물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들은 여러 선택지들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며, 자신들이 육식을 하는 것에 대해 도덕적인 반성을 할 능력이 없다. 그런 능력이 없는 동물들의 행동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는 갓난아기나 심각한 정신 지체인의 행동을 도덕적인 측면에서 비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2) 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적자생존의 법칙이다.

일부 사람들은 더욱 강한 존재가 약한 존재를 먹고 산다는 적자생존을 끌어들여 동물을 잡아먹는 것을 정당화하고자 한다. 그들에 따르면 약육강식은 일종의 자연 법칙이며, 생태계에서 상층의 존재들은 하층에 위치하고 있는 존재들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생태계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존재로, 다른 동물들을 얼마든지 잡아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답변 1) 만약 생태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는 이유로 다른 존재들을 잡아먹을 수 있다고 한다면, 생태계 상에서 우리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존재가 나타났다고 가정했을 때, 그리고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인간이라고 했을 때, 그들이 우리를 잡아먹지 말라는 법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용인할 수 없는 결론이다.

(답변 2) 우리가 생태계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으며, 우리보다 하위의 동물들을 잡아먹는 것이 자연 법칙의 일부분이라고 가정해 보자.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과정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옳다는 가정에는 추론상의 오류가 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사실 판단으로부터 가치 판단을 도출해 내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단지 우리가 생태계 상에서 가장 상위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적인 이유로 우리가 하위의 동물을 잡아먹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답변 3) 우리는 생태 피라밋에서 인간이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 인간이 자신의 지능을 활용하여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거나 포획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득히 먼 옛날에는 오히려 인간이 육식동물들의 좋은 먹잇감이었을 수가 있으며, 실제로 더 오랜 시간동안 인간이 동물들의 먹잇감이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생태 피라밋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일종의 형식이지 그러한 피라밋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 수가 있다.

(답변 4) 설령 동물을 잡아먹는 것이 자연 법칙이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는 음식을 구하기 위해 사냥을 하는 소수의 원시문화에서만 참이지, 공장식 농장에서의 대규모의 가축 사육 및 도축은 자연 법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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